< Fifty+ >銀輪으로 전국일주… 실버세대도 ‘꿀벅지’ 생겨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국토종주 그랜드슬램 인증메달 획득 77세 이동일씨

척추관협착·퇴행성관절염 진단
물리치료·민간요법 다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호전됐다 다시‘통증’

‘하체 단련하라’충고에 걷기운동
100m도 못걷고 주저앉기 다반사
걸으면 걸을수록 통증 줄고 호전

관절염 좋아지면서 자전거 도전
낙동강길 4박5일이 첫 완주기록
이젠 환경정화·재해복구 등 봉사
봉사갈때도 지하철대신 자전거로

과하게 움직이거나 운동하면 가족들이 만류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안방에 머무는 대신 다시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린 이가 있다. 일흔을 훌쩍 넘긴, 적잖은 나이다. 그가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왔을 때 들고나온 무기는 자전거였다.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몇 시간만 고속도로 위에 머물러도 졸음이 쏟아져 휴게소를 찾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인데 그는 두 바퀴로 물길을 따라 국토 구석구석을 훑었다. 목적지는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동해안, 제주도 등 자전거로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이었다. ‘국토종주 그랜드슬램 인증 메달’의 소유자, 더는 달릴 자전거길이 남지 않아 새로운 꿈을 꾸는 이동일(77) 씨에게 황혼은 아직 먼 이야기다. 지난 2일 부산 동래구 사직동 자택에서 문화일보와 만난 이 씨는 방에 전시해 놓은 각종 자전거길 인증 메달과 인증서 등을 가리키며 “늦은 나이에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준 보물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씨는 1941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1963년 공직에 발을 들인 뒤 부산시 교육위원회 공보실, 부산시교육청 총무과 공보계 주무, 동래교육청 행정계장을 거쳐 1999년 동래중 행정실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임을 했다.

36년간 공직에서 바쁘게 일했던 그는 퇴임 후 젊은 시절에는 마음껏 해보지 못한 여행, 운동 등 다양한 취미를 즐기기 시작했다. 취미활동 와중에도 부산노인신문, 실버넷뉴스, 공무원연금공단 G-시니어 기자 등으로도 활동하며 젊은 시절 못지않게 바쁘게 지냈다. 그랬던 그의 앞을 거대한 장애물이 가로막았다. 바로 건강 문제였다. “허리가 너무 아파 걷기가 힘들어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척추관협착증과 퇴행성관절염이라고 진단을 하더군요. 상태가 심각해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부작용도 우려되는 등 수술이 내키지 않아 병원에 다니면서 물리치료를 받고 몸에 좋다는 민간요법도 찾아서 받았는데, 일시적으로 상태가 호전될 뿐이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제게 걸어서 하체 근육을 단련하면 증세가 치유된다고 조언해줬습니다. 고민 끝에 일단 걷기 운동부터 해보기로 결심했죠.”

이 씨는 지난 2013년 부산 도심과 해안 등 곳곳을 잇는 ‘부산 갈맷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처음에 그는 통증 때문에 100m도 걷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수차례 주저앉다가 오기가 생긴 그는 여러 차례 코스를 나눠 걸은 끝에 9개 코스 20개 구간 263.8㎞를 완보했다. 놀랍게도 걸으면 걸을수록 통증이 줄어들고 병세도 호전됐다. ‘부산 갈맷길’ 도보 여행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부산 오륙도 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 770㎞ 완보에도 도전했다. 그는 2015년 1월 3일부터 5월 23일까지 49일간 코스를 나눠 걸은 끝에 ‘해파랑길’ 완보에도 성공했다. 그가 자전거에 호기심을 갖게 된 때는 그 직후였다.

“걷는 일만으로도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온 척추관협착증과 퇴행성관절염이 사라졌다는 게 정말 신기했습니다. 병세가 호전되니 자전거 타기에 도전하고 싶어지더군요. ‘해파랑길’을 걸을 당시 꽤 지루했는데, 제 곁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전거 라이더들을 보니 걷기보다 자전거가 훨씬 재미있겠더군요. 페달을 밟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요. 이미 걷기로 체력도 쌓이고 하체 근육도 다져져서 자전거를 탈 만한 충분한 준비가 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시작은 집과 가까운 낙동강 자전거길이었다. 이 씨는 2015년 9월 19일 부산 을숙도에서 경북 안동까지 이어지는 낙동강 자전거길 389㎞를 달리는 여정을 시작했다. 자전거 뒷바퀴에 펑크가 나 망연자실한 채 아무도 없는 길에서 도움을 기다리기도 했고, 수차례 길을 잘못 들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낙동강 자전거길의 대표적인 난코스로 젊은이들도 기진맥진하는 박진고개, 무심사, 다람재에서도 그는 혼자였다. 온갖 고생 끝에 그는 4박 5일에 걸쳐 낙동강 자전거길을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갑자기 뒷바퀴에 펑크가 났을 땐 염치 불고하고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도움을 받기도 했고, 날이 어두워져 숙소를 찾지 못했을 땐 자전거길 주변 마을 사람들의 집에 들러 부탁해 하룻밤 묵기도 했습니다. 고생스러웠지만 자전거길 주변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고 절경이 끝없이 이어졌죠. 페달을 밟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동안 살아온 삶을 반추해 보게 되더군요. 자전거길에서 그야말로 온갖 희로애락을 한꺼번에 맛보았습니다.”

낙동강 자전거길 완주로 자신감을 얻은 이 씨는 전국 자전거길 완주에 나섰다. 금강 자전거길 146㎞, 영산강 자전거길 133㎞, 한강 자전거길 192㎞, 국토 종주 자전거길 633㎞, 섬진강 자전거길 149㎞, 북한강 자전거길 70㎞, 오천 자전거길 105㎞,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 코스 242㎞, 제주도 환상자전거길 234㎞를 거쳐 2017년 4월 30일 동해안 자전거길 경북 코스 76㎞를 마지막으로 이 씨의 전국 자전거길 완주가 끝났다. 그 사이에 그의 목에는 국토교통부와 행정안전부가 인증한 국토종주 인증 메달, 4대강 종주 인증 메달, 국토종주 그랜드슬램 인증 메달이 차례로 걸렸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부산 동래구 사직동 자택에서 만난 이동일 씨가 자전거길 국토 종주 인증 메달, 국토 종주 그랜드 슬램 인증 메달, 4대강 국토 종주 인증 메달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동해안 자전거길 경북 코스를 완주하고 영덕 해맞이공원에서 인증수첩에 마지막 도장을 찍었을 때 느낀 희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노인에겐 사실 남은 내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나이에도 제가 이런 일을 도전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성취감에 감동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목표를 세우면 그 목표가 사람을 이끌더군요. 지금 제 친구 중엔 요양원에 있거나 제대로 거동을 못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국 자전거길을 모두 완주한 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자전거로 완주해보고 싶었는데, 팀을 이룰 수 있는 동년배 라이더가 없더군요. 결국 지난 5월에 산티아고 순례길의 일부 구간을 걷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이 씨가 자전거를 통해 얻은 자신감은 다른 영역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2016년 부산시가 지원하고 청전복지관이 주관하는 패션모델 경쟁에서 선발돼 부산디자인센터 런웨이에 올랐다. 2017년에 그는 자전거로 부산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시정을 살핀 공로를 인정받아 우수시정 모니터로 부산시장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처음엔 가족들이 제가 자전거를 타는 일을 말렸는데, 제 몸이 점점 좋아지고 또 인증 메달까지 가져오는 모습을 보니 응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건강을 해칠지 몰라 말렸는데 몸이 좋아지니 말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집안에서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쳐서 정형외과에 다녀왔는데, 의사가 허벅지에 왜 이렇게 근육이 많이 붙어있냐며 놀라워하더군요. 제 나이에 이 정도로 허벅지 근육이 많은 사람을 처음 봤다면서 말이죠.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 나왔습니다.”

자전거를 타지 않는 날에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1만 보 이상 걷는 일을 빼놓지 않고 있다. 이 씨는 자전거를 통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여유도 얻었다. 그동안 자신을 위해 살아온 삶을 다른 이들을 위해 쓰기로 한 것이다. 그는 현재 상록봉사단에 회원으로 가입해 거의 매일 부산시민공원 환경 정화, 재해 현장 복구 지원, 복지관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스마트폰 교육, 김장 담그기 등 폭넓은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누적봉사활동 시간도 지난달 어느새 1000시간을 넘어섰다.

“봉사활동을 하러 갈 때도 지하철 대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합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전거로 운동도 하는 셈이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시정을 꼼꼼하게 살핍니다. 자전거 위에선 차를 타고 다니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보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될지 모를 제 여생을 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헌신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게 자전거를 통해 생긴 변화입니다. 자전거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고민하지 마시고 일단 라이딩을 시도해보시죠. 자신의 둘러싼 많은 것이 바뀔 겁니다.”

부산 =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