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를 돌아보니 보람보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가장 아쉬운 것은 ‘세종 성군 논쟁’이다. 이영훈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노비정책과 사대주의 외교를 들어 세종을 백성이 아닌 양반들의 성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실록을 토대로 세종 흠집 내기의 오류를 지적했다. 1라운드 노비 논쟁에 이어 2라운드 사대주의 논쟁으로 한창 토론이 뜨거워지던 중 이 교수는 “박 교수의 논설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면서 일방적으로 지상논쟁 중단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의 문제 제기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산적 논쟁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고대사 문제나 식민지 근대화 문제 등 여러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사료와 해석을 가지고 자기주장만 하는 데 그친다. 한자리에 모여 논박과 검증을 하면서 지식이 성장하는 과정이 없다.
지식 성장을 위한 생산적 논쟁의 가장 큰 장애물은 사실의 왜곡이다. 이 교수의 세종 비판이 그 예다. 가령 이 교수는 1433년(세종 15년) 3월의 어전회의를 언급하면서 세종을 “정치와 인륜을 구분하지 못한 왕”이라고 비판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살폈듯이, 이즈음 조선은 총사령관 최윤덕을 압록강 근처에 대기시켜 놓고, 국경 건너 파저강의 여진족 토벌 계책을 다양한 채널을 가동해 검토하고 있었다. 이 회의와 관련해 이 교수는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거나 대오를 이탈한 군사를 모두 참(斬·목을 벰)하는 군법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세종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군대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군사에 대한 세종의 자애는 엉뚱하게 조선왕조의 군대를 허물고 있었는지 모른다”고도 했다.
왜곡된 인용이다. 이날의 실록을 보면 세종은 대신들을 불러 여진족을 토벌하는 군사의 양식 준비와 명령 불복종 문제 등을 의논하고 있다. 후자, 즉 명령 불복종과 관련해 세종은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은 자와 대오 이탈자를 모두 목을 베면 처벌받는 자가 자못 많을 것이며(受罪者頗多), 반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군령이 엄하지 못할 것인데(軍令不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세종이 만약 ‘정치와 인륜을 구분하지 못한 왕’이었다면 파저강 토벌 즈음에(3월) 대규모로 온천에 행차해 여진족을 안심시키는 기만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대규모 간첩부대 따윈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그 당시 평안도 강변(江邊)에서 상시 활동하던 첩보부대원이 540명에 이르렀다. “병가(兵家)에서는 정직함만을 숭상해서는 안 되고 부득이하면 기이한 술책도 겸용하여야 한다”는 세종의 군사전략에 따른 조처였다.
일종의 ‘실미도 부대’를 운영하기도 했다. 평안도 지역의 사형수 중에서 저쪽 길을 알고 용략(勇略)이 있는 자 두어 사람을 선택해 압록강을 넘어서 들어가도록 하여, 낮에는 산의 숲에 숨고 밤을 틈타 가만히 다니면서 적의 소굴을 염탐하게 하여 죗값을 속하게 하라는 왕의 지시가 그것이다(1437년 10월 17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세종 성군 논쟁’이 일시적 관심 끌기에 그치지 않고 생산적 논쟁으로 계속되기를 바란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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