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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9년 01월 11일(金)
세상 향한 허기 채우고 어른으로… 아이들 키운 ‘하얀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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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까지 운영된 서울 마포구 도화동 경보극장은 현재 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촬영된 1992년에도 이 극장이 영업 중이었지만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로 이어지는 시대상을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개조돼 있어 제작진은 고민 끝에 광주 현대극장에 경보극장 간판을 달고 촬영했다. 학교 장면은 목포에서 찍었으며 벼랑창 장면도 여주 신륵사 강변에서 촬영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144)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배경 마포 경보극장

작가 안정효 동명소설 영화化
궁핍했던 1950~1960년대에
美 할리우드 영화 등을 통한
당시 新식민주의 역기능 질타

주인공인 명길·병석 이야기로
어린시절 아련한 추억 담으며
왜곡된 영화인생 집착 보여줘

1929년 ~ 1993년까지 자리한
‘서울의 보물’뜻 가진 京寶극장
지금은 허름한 주차 공간으로


오래전엔 번창했던 지역일수록 현대에 이르러 그 법정구역, 행정구역이 아주 잘게 나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洞)은 참 많은데 그 동 하나하나가 대부분 미니 사이즈라는 얘기다. 마포(麻浦)구가 그렇다. 법정구역이 모두 26개나 된다. 내비게이션을 치고 노고산동이니 상수동이니 신수동을 찾아가다 보면 금세 해당 구획을 벗어나기 십상이다. 마포구는 한때 국내에 소금을 실어 나르던 중심지였다. 평양 냉면집 ‘을밀대’로 유명한 염리동(鹽里洞)은 예전엔 말 그대로 소금장사들이 살던 동네였다. 그만큼 한때 돈이 넘쳐나던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상인들이 넘쳐나면 술집과 여염집, 모여 노는 곳이 북적거리기 마련이다. 도화동(桃花洞)도 그렇다. 한때 복숭아 꽃이 많이 피었던 모양이고, 그래서 복사 골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보면 ‘도화살(桃花煞)’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만큼 색기(色氣)와 요염함이 질퍽하게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금의 불교방송 뒤쪽 길을 지나가다 보면 골목길 안쪽으로 음식점과 술집들이 비교적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국이어서 작금의 깔끔한 재개발 현대화와는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그 거리 정도를 제외하고는 도화동 거리도 어마어마하게 바뀌었다. 그 길을 따라 죽 위로 올라가 공덕동 오거리까지 가보면 바야흐로 신천지가 됐기 때문이다. 싹 판 갈이가 됐다.

그곳에 1929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64년 동안 경보극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제 그리 많지 않다. 경보(京寶)는 ‘서울의 보물’이란 뜻으로 그 전에는 도화극장으로 불렸다. 지금은 경보주차장이라는 허름한 공간으로만 존재하는, 덩그렇고 서러운 장소가 돼버렸다. 극장 주변 먹거리 한판 동네였던 한흥시장도 언제부턴가 대형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주상복합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옛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산천은 이미 의구(依舊)하지 않은 데다 인걸(人傑) 역시 간데없는 셈이 돼버린 것이다.

1994년 불세출의 현대 작가 안정효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정지영 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마포란 곳, 그리고 거기에서 영화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경보극장을 기록해 냈다는 측면에서 가히 ‘기념비적’인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전후(戰後) 궁핍할 대로 궁핍했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이른바 양키 문화라고 하는 것이 미국 할리우드영화를 통해 어떻게 이 땅에 이식(移植)됐고, 또 어떠한 굴절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역사성을 지니기도 한다.

당시 사람들, 특히 상당수 청소년은 세상에 대한 허기를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채워야만 했다. 아이들 특유의 왕성한 성욕 역시 이들 영화에 대한 수음을 통해 만족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 역시 당시 시대가 주인공 명길(홍경인)과 병석(김정현) 같은 아이들을 키운 곳이 학교가 아니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명길과 병석의 모든 발칙하고 음란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사실적이었던 상상력이나 둘의 성정 자체를 완성한 곳은 바로 극장이었다.

그리고 또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던 산동네, 달동네이기도 했다. 명길은 그곳에서 미8군 무대에서 무희(舞姬)로 일하던 병석의 누나에게 동정을 잃는다. 병석은 이미 그 전에 마포의 한 누추한 여관에서 창녀와 경험을 갖은 터이다. 누추한 시절의 아이들일수록 일찍 성장하는 법이다. 병석은 청소년답지 않게 몸을 파는 여자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치마보다 먼저 팬티를 벗어 줘.” 여자는 거리낌 없이 그 요구를 받아준다. 그러자 다시 병석은 여자에게 이런 ‘디렉팅’을 한다. “다리 밑에서 갑자기 바람이 분 것처럼 치마를 움직여 봐.” 메릴린 먼로의 ‘7년 만의 외출’을 본 적이 없는 창녀는 병석을 향해 깔깔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너, 변태 아니니?”

▲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장면들.

병석은 중학생 때부터 디노 데 로렌티스와 카를로 폰티의 이름을 앞세우며 이탈리아 영화 ‘율리시즈’를 들먹여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명길은 그런 병석에게서 버트 랭커스터와 데버러 커의 해변 정사신을 담아낸 ‘지상에서 영원으로’부터 수전 헤이워드 주연의 ‘나는 고백한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다이얼 M을 돌려라’ 등 모든 할리우드 영화를 배우고 섭렵하기 시작한다. 명길은 ‘영화적으로’ 명석한 병석을 흠모하고 따라 하게 되지만 점점 더 그를 따라잡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는 야릇한 경쟁 관계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현숙(신혜수)이라는 여고생과의 삼각관계도 큰 몫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 성인이 돼 실제로 영화감독이 되는 것은 병석(최민수)이 아니라 명길(독고영재)이다.

학생들이 교복을 마치 군대 제복처럼 입었던 시절, 명길과 병석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극장 주변을 배회하고, ‘침투’해내고, 영화를 보고, 경찰과 단속반 선생들을 피해 줄행랑을 치고, 그러다 걸려서 매번 흠씬 두들겨 맞기 일쑤다. 인생은 프랑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4백번의 구타’가 연속으로 행해지던 시절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모든 주 무대가 마포 경보극장이었다. 두 아이와 그의 ‘똘마니’ 아이들 심지어 이들을 그루피(groupie)처럼 따라다니는 여학생들은 앙꼬빵 집에서 만나 모두 뻥튀기 아저씨에게 가방을 맡긴 채 때론 어른인 양 옷을 갈아입고서는 극장을 드나든다. 그리고 결국 명길과 병석은 그 과정에서 친구 한 명을 사고로 잃기도 한다. 그 아이는 명길과 병석을 따라 극장에 왔고 이들을 적발해 낸 선생의 추적을 피해 난간에 매달렸다가 추락사한다. 극장은 영화만큼이나 두 주인공 아이들에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었던 셈이다.

정 감독은 극장 영사기 빛처럼 스크린 위에서 명멸했던 두 아이(두 남자)의 기구했던 영화적 삶을 그려 낸다. 병석은 결국 화재사고로 아이를 잃고 실어증에 걸리지만 인생 최대의 역작인 시나리오 ‘가면고’를 완성하고 명길은 그걸 바탕으로 자신 역시 최고 걸작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거기엔 그 둘만이 알아챌 수 있는 불길한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결국 비극으로 가는 전조(前兆)를 깔고 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병석이 써낸 모든 대사는 지난 시절의 할리우드 명화(名畵)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새로운 콜라주인가 아니면 기막힌 사기술을 이용한 표절에 불과한 것인가.

▲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장면들.

정 감독은 주인공 병석의 왜곡된 영화 인생에 대한 집착을 보여줌으로써 ‘미국 영화=미국식 문화=미국의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통해 바깥세상을 연결시키고, 또 그에 대한 의식과 인식의 확장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당시 한국의 신식민주의적 사고방식과 그 종속(從屬)의 역기능을 질타한다. 이 영화의 도입부가 정 감독 스스로 벌였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의 할리우드 직배 반대 투쟁의 뉴스 릴로 구성돼 있는 것도 그 같은 영화적 메시지의 일환을 전달하려는 처사와 다름없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뉴스와 영화 사이에서, 그리고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또 영화적 현실과 그 이상 사이에서, 1990년대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찾아내려 애쓴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의 비루한 현실을 다시 한 번 마주하고 체감하게 만든다.

▲  오동진 영화평론가
모든 이상(理想)이 비껴가기 직전, 그러니까 그 순수의 영롱한 빛을 잃기 직전의 시절, 명길이 병석을 처음 만나는 곳은 마포 벼랑창(별영창)의 강변에서다. 남자아이들은 거기서 모두 다 발가벗고 자맥질을 하며 놀았다. 암벽 위 바위에서 스스럼없이 한강 물속으로 자신들의 몸을 던지곤 했다. 지금 그 강변의 언덕을 찾아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무서우리만큼 속도를 내 달리는 강변도로를 건너야만 하기 때문이다. 공간은 종종 영원히 잊히지만 순간순간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순전히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같은 영화 덕이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흥행 면에서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건 너무 많은 영화 장면이 섞여들어 가 있고 사람들이 그 의미 모두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영화 속 영화 장면 그러니까 ‘로마의 휴일’에서부터 ‘벤허’ ‘스파타커스’ ‘애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과거의 주옥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재발견하는 재미를 한껏 선사한다. 그 흥미로움은 이제껏 그 어떤 작품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영화가 마니아형이었음을 보여 준다. 영화가 성공하지 못한 건 영화가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였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 영화는 한 시대의 랜드마크 같은 무엇을 만들어 낸 셈이다. 이 영화 이후 사람들은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들, 혹은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들을 가리켜 주저 없이 ‘헐리우드 키드’라고 부르게 됐다. 대명사가 된 것이다. 그것만이라도 정말 어디인가. 지나간 영화, 그 영화의 무대가 됐던 장소는 늘 역사가 된다. 아니 역사 자체가 영화를 스스로 만들어 내곤 한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딱 그렇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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