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국민연금은 권력의 시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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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용 경제산업부 차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3일 ‘공정경제 추진전략회의’에서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서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원칙)를 적극 행사하겠다. 반드시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밝힌 뒤, 경제계는 “도대체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이냐”며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한진칼과 대한항공에 대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적용과 관련,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한진그룹과 조양호 회장 일가의 처지를 지켜본 다른 대기업들을 벌벌 떨게 할 만한 경고였다. 큰 그림이 들켰던 것인가. 청와대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라고 주워 담았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자,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린 데 따른 부작용에서 소득주도성장의 정당성을 느꼈다는 대통령의 고집을 국민은 확인했다. 대기업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당부하면서도 “오래전 기업의 낙수효과는 끝났다”는 반(反)기업적 시각을 피력한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본심이 잘 드러난 발언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공정한 시대를 만들자는 말에 누가 동의하지 못할까. 대기업의 탈법과 위법 행위가 유죄로 확정된다면 대기업 오너나 경영자들도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는 헌법이 규정한 무죄 추정의 원칙을 거스를 수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이대로라면 정부나 노동계의 뜻대로 대다수 대기업과 경영인들이 일방적으로 시련을 겪을 소지가 있다. 지난 16일 공개된 스튜어드십코드 가이드라인을 보자.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임원교체를 요구하고, 주주대표소송이나 손해배상소송을 할 수 있는 중점관리 대상기업은 국가 기관의 ‘조사’ 등에 근거해 △횡령 △배임 △부당지원행위 △경영진의 사익편취에 해당할 ‘우려’로 인해 기업가치를 훼손하거나 주주권익을 침해할 수 있는 기업이다. ‘조사’와 ‘우려’는 포괄적이고 애매한 표현이다. 검찰과 경찰은 물론,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국세청 등 모든 기관이 은밀한 지령을 받아 ‘조사’만 착수해도 중점관리 대상기업 요건에 충족된다. 만약 노사 갈등이 있던 대기업의 노조나 시민단체가 검찰에 경영진을 고발하고, 국가기관의 조사 내용이 언론에 유출돼 대서특필되더라도 이 또한 ‘우려’가 있는 것이니 요건을 갖춘 셈이다. 적어도 1심 판결은 보고 나서 판단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중립성이다. 우선 국민연금의 김성주 이사장부터 여당 국회의원 출신 낙하산이다. 기금운용위원회 20명 중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장관, 국민연금 이사장과 정부 부처 차관 4명 등 6명은 정부 인사다. 노동계 대표가 3인, 정부 영향력 하에 있는 기관의 대표도 4명 정도 포진해 있다. 참여연대 출신 등 민간 인사까지 포함하면 전체 20명 중 최소 14명은 문재인 정부 사람들과 확실하게 뜻이 통한다. 김수이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아시아태평양 대표는 최근 “CPPIB는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면서 스튜어드십코드의 성공 비결로 중립성을 꼽은 바 있다. 스튜어드십코드가 권력 유지의 시녀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기금운용위원회 구성부터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my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