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北에 치우치면 ‘중재’도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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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조 前 외교통상부 차관보 제19대 국회 외교통일위원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제재 해제를 절실히 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다른 셈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북한의 핵 개발 목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북한은 일관되게 미국의 군사 위협에 대처하고 체제를 보전하기 위해 핵무장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 핵 개발의 또 다른 측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 즉,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을 비롯한 대량파괴무기(WMD)를 개발해 비대칭 전력에 의한 대남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을 사거리에 두는 1000여 기의 중·단거리 미사일에도 핵무기 탑재 능력을 갖추고 있다. 정권의 보검인 핵무기를 단지 제재 해제를 대가로 모두 포기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 점에서 하노이 회담은 미·북의 셈법에 대한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이었다.

앞으로도 미국이 제재를 가장 실효적인 대북 지렛대로 삼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나 북한의 밝은 경제적 미래를 강조하는 것만으론 비핵화를 이루기 어렵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 발생 이후 4반세기에 걸친 북핵 협상에서 얻은 교훈 중 하나는, 경제적 보상으론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94년의 제네바 회담과 2002년 2차 북핵 위기로 시작된 6자회담에서 경제적 보상을 통한 비핵화가 시도됐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북한이 경제 번영을 진정으로 원하는지도 의문이다. 제재가 계속되면서 경제적 곤궁으로 인한 주민의 불만이 체제를 위협할 위험은 피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 번영이 개혁·개방으로 연결돼 체제 유지를 위태롭게 하는 모험을 감수할 자신감도 없어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 김정은은 핵과 경제 발전이 가져올 양날의 위험이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니 아무리 중국과 베트남의 경제 발전상과 체제 안정을 보여주고 북한의 밝은 경제적 미래를 약속해도 선뜻 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 간극이 큰 미·북 양측의 셈법이 사전에 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한 희망적 관측으로 싱가포르 회담 2.0을 기대한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현재로썬 양측의 간극을 좁히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각자의 국내 사정도 만만찮다. 미국에서는 회담 결렬을 오히려 잘된 것으로 평가하면서 ‘비핵화 이전 제재 해제 불가’라는 강경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북한 역시 무오류의 리더십에 상처를 입은 김정은이 도발적 조치로 난관 돌파를 획책할 수 있다. 이미 새로운 미사일이나 인공위성 발사 조짐이 보인다. 북한에는 인공위성도 안보리 제재 위반 사항이다. 그동안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의 부재를 성과로 내세웠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타격이 될 것이다. 그 경우 비핵화 협상 재개는 상당히 미뤄지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도 위태로워질 것이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한국의 중재자 역할이 필요한 때다. 성공하는 중재는 양측의 신뢰를 필요로 한다. 문재인 정부가 하노이 회담의 성공을 전제로 남북 관계 개선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전열을 정비한 것은 자칫 한쪽의 입장에 경도돼 다른 쪽의 입장에 배치되는 조치로 인식될 우려가 있다. 신뢰를 잃게 되면 우리의 입지가 상실되고 남북 관계 개선도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의 중재는 북한의 셈법에서 대남 군사적 우위를 포기시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비핵화의 달성과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