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北 정권의 본색과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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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논설위원

지난해 말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어 프라이빗 워(A Private War)’는 영국 선데이타임스 종군기자 마리 콜빈(1956∼2012)의 분쟁 현장 취재기를 다룬 영화다. 체첸 분쟁과 코소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전, 그리고 아랍의 봄 당시 리비아 내전 및 시리아 내전 현장엔 늘 콜빈이 있었다. 스리랑카 내전 취재 때 왼쪽 눈을 잃어 애꾸눈 해적 선장처럼 안대를 하고 현장을 누벼 더 유명해졌다. 콜빈은 2012년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자 홈스로 들어가 취재하던 중 산화했다. 그는 당시 CNN과의 전화 인터뷰 때 “평생 전쟁 취재를 했지만, 이곳은 최악이다. 시리아 정부군이 민간거주지역에 포격을 하고 있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대통령궁에 앉아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살육 명령을 내리고 있다”고 증언했다. 방송 다음 날 시리아군은 그가 있던 지역을 폭격했고, 콜빈은 즉사했다.

바샤르는 시리아의 독재자인 아버지 하페르 알아사드가 2000년 6월 심장마비로 사망한 뒤 대통령직에 올랐다. 당시 시리아 국내외에서는 그가 영국에서 교육받은 안과 전문의라는 점에서 기대감이 남달랐다. 30년 철권통치를 해온 아버지 하페르와 달리 최소한 개방과 다원주의를 수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아랍의 봄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바샤르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대응할 것이라는 낙관이 있었다. 그러나 바샤르는 콜빈이 고발한 것처럼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자국민을 학살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12월 사망한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 최고지도자가 됐을 때, 시리아의 바샤르 초기 때와 같은 기대가 있었다. 북한을 떠나지 않았던 아버지와 달리 김 위원장은 유년시절 스위스에서 유학했다는 점에서 북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과 판문점 도보 다리에서 대화를 하고,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만 해도 김 위원장의 리더십은 선대와 다르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결렬 후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협상 중단을 고려 중”이라며 안면을 바꾸기 시작했다. 북한이 1990년대식 벼랑 끝 전술로 되돌아간 것을 보면 김 위원장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바샤르가 시리아라는 감옥 체제의 수인(囚人)이듯, 김정은도 북한 체제의 관행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