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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편식주의자의 미식여행 게재 일자 : 2019년 05월 22일(水)
달밝은 밤 송화주 한잔… 300년 반가의 ‘품격’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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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안동시 임동면의 정재종택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인 송화주와 종택의 종부가 견과 등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안주. 솔잎과 국화로 빚는 송화주에서는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안동 다섯 고택의 내림음식 - (2) 정재종택

이황 계승 정재 류치명의 종가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 지원

내림술은 280년 역사 ‘송화주’
쪄서 말린 국화잎 사용해 빚어
1993년 경북 무형문화재 지정

정성스럽게 모양 빚어낸 안주들
각양각색 소반에 정갈하게 한상

아침상엔 잣죽과 4~5가지 반찬
고소한 맛…폭신하고 탄력있어
섬세한 맛 북어 보푸라기와 조화


칠계재를 시작으로 안동의 고택여행이 시작되던 지난 주 안동에 영국의 앤드루 왕자가 다녀갔다. 그의 모친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20년 전 안동방문을 기념해 그녀가 다녀갔던 ‘여왕의 길’(Queen’s Road)을 다시 방문했고 재현된 그녀의 생일상에는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칠계재의 안주인이 직접 만든 떡 고임이 올랐다. 영국 여왕의 아들마저 안동을 다녀갔으니 이제는 그들의 여행길을 ‘왕가의 길’(Royal Road)로 기념하게 된다. 때마침 안동 기행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의미 있는 여정이 되고 있다. 영국 왕실이 특별히 안동을 방문했던 이유는 한국의 전통이 가장 올곧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집안의 내림음식을 조상들과 후손이 함께 즐기는 안동의 내림음식 문화를 계속 따라가 본다.

# 어깨너머로 음식을 익히다

오늘의 여행지는 임동면 수곡리 정재종택(定齋宗宅)이다. 정재종택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柳致明·1777∼1861)의 종가다. 이 집은 원래 임동면의 한들(대평·大平)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립으로 1987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과수원이 조성돼 있는 진입로를 통해 오르다 보니 오른쪽으로 별채와 사당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뜰이 나타났다. 정재종택의 김영한 종부가 맞아주었다. 잣, 곶감, 마른 한치 등과 모과차와 국화차로 꾸린 다과상을 받았다. 다과가 너무 예쁘다 하니 “그냥 혼잡(혼자 장난삼아 하는 일)을 즐깁니다”라며 미소 지었다.

“정재 할아버지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 일상을 중요시하라. 근면, 검소하라’는 말씀을 남기셨어요. 이 집안 자손들은 ‘가세영언(家世零言)’이라는 책자를 통해 집안 조상의 가르침을 만납니다.” 이 가문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바로 정재 류치명이 생존했던 1700년대.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했고 집안을 지키는 장손을 제외하고 많은 남자가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하거나 옥고를 치렀다.

“친정도 종가였기 때문에 종부였던 친정어머니의 삶을 많이 보고 배운 것 같습니다. 늘 대우받으셨지만 종부로서의 역할과 책임도 막중하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고 살았어요.” 그는 유년시절을 종가에서 보내고 도시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종가에서 살 때는 내로라하는 문중의 딸이라는 후광으로 ‘특별대접’이 당연한 줄 알고 지냈다는 그는 가족과 떨어져 도시생활을 하면서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이런 상처는 내상이 된 게 아니라 겸손을 배우는 계기가 됐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그는 자녀를 교육하면서 늘 겸손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자라면서 조상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많다고 느끼며 살았습니다. 늘 마음에 있었던 것인지, 나 또한 종부의 삶을 살고 있어요. 맞습니다. 종부로서 자부심이 큽니다.” 국내 최초의 조리서 ‘수운잡방’이 탄생했던 친정에서 음식 만드는 방법을 많이 배워 시집 왔을 것이라는 당연한 짐작은 한참 빗나갔다. “친정에서 막내로 자라다 보니 부엌일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았어요. 하지만 친정에서 부엌 살림살이를 자주 어깨너머로 봐왔던 것이 후에 시집의 문화와 가문의 내림음식을 배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밝은 달빛 아래 ‘송화주’ 한잔

“송화주’가 내림술입니다.” 송화주의 역사는 정재종택의 역사와 비슷한 280년 정도다. 송화주는 솔잎과 국화잎을 이용해 만든다. 과거에는 인동초도 넣기도 했고 생국화도 넣기도 했는데 요즘은 쪄서 말린 국화잎만을 사용하고 있다. “저희 집에 오신 손님들에게 송화주 탁주와 약주 그리고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이화주, 가을에는 포도약주 또는 모과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송화주는 1993년 2월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된 술이다. “요즘엔 술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끔 옵니다.”

송화주와 함께 나온 안주는 정성스레 모양을 낸 것이었다. 배를 갈라 잣을 세워 장식해낸 대추, 호두 그리고 견과류를 말아 가위질로 장식해낸 곶감 등. 모양도 예뻤지만 정성이 눈에 확연하게 보였다. 부탁을 하니 만드는 방법도 보여 주었다.

안채에서 동행인과 소반에 마주 앉아 술과 어울리는 다양한 안주를 함께 즐겼다. 술을 담아낸 다양한 술 주전자며 술잔 모두 아름다웠는데 그 중 술상으로 쓰인 소반이 눈에 들어왔다. 세월이 담겨있는 오래된 소반이, 아파트 생활과 입식생활을 하는 내게 오래전 가족과의 기억을 소환해 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안채 방 선반에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소반이 여러 개였다. 김영한 종부는 소반의 다리 모양, 용도, 지역에 따라 다양한 소반의 종류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저녁 시간 즈음 퇴근하는 종손(정재종택 주인)과 마주한 것은 행운이었다. 증조할아버지와의 추억이며 정재종택 근처 임동면 수곡리 호수 앞이 과거 영덕으로부터 1차 소금 간을 한 후 이동해온 고등어의 2차 간을 하던 장소라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편안하게 손님을 대하는 종손의 배려가 고마웠다.

종손은 “정재종택을 제대로 즐기려면 깊은 밤 산봉우리에 걸쳐 있는 달밤의 풍경을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 말대로 체험 때 즐긴 술상을 침실 방 툇마루로 옮겨와 깊은 밤 달빛을 즐기기로 했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아무도 없는 늦은 밤, 고택에서 운치있게 즐기는 달빛과 송화주의 조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완벽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했다.


# 잣죽과 북어 보푸라기… 담백한 아침상

정재종택의 아침상 메뉴는 잣죽이다. 김치, 김무침, 3색 보푸름, 명란, 나물과 전은 번갈아서 4가지 혹은 5가지로 구성된다. 근처 잣나무가 많아 잣죽의 재료가 되는 잣 수확이 좋고, 죽이 아침에 부담이 없어 손님들 반응도 좋다고 한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 시집오자마자 죽을 잘 쑨다고 칭찬을 많이 해 주셨어요. 몸 기운이 안 좋으시다 해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눈대중으로 한번 죽을 쒀 드렸는데 아주 맛있다고 좋아하셨어요.”

죽은 생쌀을 참기름에 볶다 타기 직전에 물 한 방울 떨어뜨려 볶고 또 물 한 방울 넣고 또 볶고 이렇게 정성을 들여 만든다. 이후 정재종택 종부의 죽 만드는 솜씨가 집안에 소문이 나서 남편도 덩달아 친인척 중 누가 아프기만 하면 죽을 쒀 달라 부탁했다고. 이렇게 ‘잣죽’은 이 집의 대표음식이 되었다.

폭신하고 탄력 있는 잣죽의 감촉은 섬세하고 은은한 맛의 북어 보푸라기와 잘 어울렸고 보드랍고 은은한 생선 향이 특히 좋았다. 안동만의 음식은 아니었으나 내륙에 위치하다 보니 해산물과 생선을 말려 오랫동안 귀하게 여기며 즐기는 문화가 강했던 안동에서 더욱 특화됐다. 만드는 법도 단순하지 않다. 물에 불린 북어를 적당히 말린 후 뼈와 가시는 촘촘하게 모두 깨끗이 제거한다. 이후 놋숟가락으로 일일이 긁어낸 북어 살을 소금, 설탕, 참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쳐낸다. 부드럽고 맛이 깊다.

▲  정재종택의 김영한(오른쪽) 종부가 종택을 찾은 손님에게 말린 과일과 견과로 안주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종가에서 느껴야 할 것들

가문의 종부로서 가문의 전통과 종택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감의 무게가 어느 정도냐고 물었더니 되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아이들에게 한 번도 강요하지 않았어요. 나도 오십 넘어 음식뿐만 아니라 집안 일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처럼 아이들도 며느리도 나중에 다 하지 않겠는가 그리 기대하고 있습니다.”

▲  강태안 미식여행가
수시로 많은 손님을 치르며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었을까. “준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다만 요즘은 일손도 없고 구하기도 힘들어 손님 치른 이후부터 정리하는 것까지 혼자서 하기에 가끔 힘들 때가 있습니다.” 손주를 둔 나이인 종부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안동의 고택도 엄연히 관광 숙박업소이고 수준 높은 음식 문화를 전달하고 있는 영업장임을 감안할 때 이런 고택에서 전공 대학생들이 실습을 하면서 일손을 보태면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 후 텃밭과 정재종택 주변 산책을 종부와 함께했다. “정재종택은 계절마다 인근의 꽃과 과수원 등이 어우러져 자연의 변화가 아름답습니다. 봄에는 종택 주변 꽃이 만발하고 가을, 특히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과 수확 시기에는 대추, 모과, 밤 등 먹을 거리가 많아요. 겨울이면 군불을 쬐거나 온돌방의 정취를 느끼는 것도 좋습니다.”

정재종택 김영한 종부를 통해 손님을 맞는 이의 겸손과 배려, 여유와 자부심이 느껴졌다. 또한, 아름다운 300여 년 전통 고택에서 이어져온 내림음식의 한 자락을 경험할 수 있었던 고택체험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강태안 미식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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