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에로틱 시네마>끝없이 반복되는 ‘性의 구걸과 거절’… 지식인의 추잡한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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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

R(문성근)이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공항에는 먼저 귀국했던 J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여전히 예쁘고 싱그러운 J(강수연)는 함박미소를 지으며 R을 맞아주었고 그들은 안부를 주고받으며 J의 차로 향한다. “주무시고 갈 거죠?”라는 J의 물음에 R은 그럴 거라고 했고 그들은 한 여관에 안착한다. 여관방에서 ‘예전에 그랬듯이’(R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대사다) 걸쭉한 섹스를 기대했던 R은 종종걸음으로 나가버리는 J가 원망스러웠지만 이내 잠을 청한다.

등장인물이 이니셜로 불린다는 점을 제외하고 오프닝 초반 6분은 지극히 평범한 남녀의 재회로 시작하는, 지극히 평범한 영화임을 가장하지만 이 영화는 1991년 개봉해 한국영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장선우 연출의 ‘경마장 가는 길’의 서두다. 영화는 R과 J가 재회한 지 이틀째부터 충격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침에 R을 데리러 온 J에게 R은 유성으로 가자는 말을 한다. 유성에는 뭐하러 가냐는 J의 물음에 R은 “그러니까 음… 유성에 가서 온천물에 좀 담그고 그러고는… 네 젖가슴에 내 얼굴을 좀 비벼대고, 네 젖꼭지를 만지다가 네 사타구니에 내 사타구니를 밀착시키고… 그러다가 예전에 그랬듯이 몸을 섞고 뭐 그러는 거지”라고 말한다. 지식인의 말투로 J에게 설교를 늘어놓던 R은 이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단 하나의 욕망을 서슴지 않고 드러낸다. 그러나 J에게 더 이상 ‘예전에 그랬듯이’는 통하지 않는다. J는 R의 구걸을 단칼에 내친다.

집이 대전인 R은 매일 J를 만나러 서울로 향한다. 그들의 일과는 이틀째에 그들이 나누었던 실랑이를 정확히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방에서도 식당에서도 R은 J에게 몸을 내주기를 요구하지만 J는 거절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R에게도 명분이 있다. 이들은 프랑스 유학 시절 3년이 넘는 기간 동거를 했던 사이고, J가 먼저 귀국해 버리면서 R은 꽤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J가 물러섬 없이 R을 거절하자 R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명분을 들이댄다. 역량도 안 되는 J의 학위수여를 도와주기 위해 R은 J의 논문을 대필해 주었고 그 덕에 여자는 잘나가는 문학평론지에 글도 쓰고 이름도 알리며 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R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고 J는 그가 원하는 것, 즉 그와의 섹스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J가 남자의 ‘개뼈다귀 같은 소리’에 응해줄 리 없다. R은 결국 3000만 원이라는 돈을 요구한다. 돈을 주지 않으면 여자의 논문이 대필이었음을 폭로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관객은 J의 분노, 혹은 R에 맞설 만한 논리적 대응을 기대하겠지만 J는 공항에서 보여주었던 함박웃음을 지으며 3000만 원어치의 섹스를 하겠다고 나선다. 결국 R이 이 지긋지긋한 게임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들은 여관으로 향한다. R은 “젖가슴에 얼굴을 좀 비벼대고, 젖꼭지를 만지다가 사타구니에 사타구니를 밀착시키고…” 등등의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J와 만나 몸을 섞는다. 결국 여자를 소유한 R은 다른 나라로 함께 떠나자고 종용하지만 또다시 보기 좋게 거절당한다.

‘경마장 가는 길’은 한 지식인 남녀의 추잡하고 가증스러운 대화로 가득 찬 영화다. 관객은 두 시간여 동안 R이 J에게 끊임없이 섹스를 구걸하고 J가 한결같이 거절하는, 이 끝 없는 사이클을 목도해야 한다. 영화의 시선 역시 이들을 향한 조소를 숨기지 않는다. 가령, R의 섹스타령이 시작될 때면 카메라는 두 남녀를 탈출해 인근의 어떤 다른 남녀를 보여주는데 이는 취객이 돈을 주고 하룻밤 상대를 사는 순간이거나 여관에서 몰래 나온 남녀가 헤어지는 순간이다. 따라서 영화는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땄거나 혹은 샀던 행위가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즉 욕망이 돈으로 환원되거나 돈이 욕망으로 환원되는, 그 치졸한 거래들과 정확히 같은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일지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경마장 가는 길’에는 경마장이 아닌 여관이 나온다. 돈 놓고 돈 먹기의 게임은 몸 놓고 몸 먹기의 게임으로, 말(馬)만도 못한 군상들의 근원적 지배욕망으로 역설된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