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미국인 기자이자 사업가였던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집인 ‘딜쿠샤’는 문화 탐방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자료 사진·조은 시인
(2) 사직로 앨버트 테일러 집 ‘딜쿠샤’
3·1운동 최초로 알린 美 기자
1942년 추방때까지 19년기거
자석처럼 끌려서 가본 은행나무
한참 보고서야 발견한 벽돌집
사람 손길에 벗겨진 나무계단
건물전체가 물에 잠긴 듯 조용
광화문 직장인들 발길 잇따라
복원공사에 늦춰진 개방 아쉬워
인왕산 위에서 경희궁 쪽을 보면, 시선을 끄는 문화재급 건물이 몇몇 있다. 국사당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바짝 낮추면, 고대 힌두어로 ‘희망의 궁전’을 뜻한다는 딜쿠샤도 보인다. 3·1운동을 최초로 세계에 알린 미국인 기자이자 사업가인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집이다. 테일러는 수원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는 한편, 일본 총독을 찾아가 민간인 학살에 항의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으며, 자택에 감금(1941년)됐다가 추방(1942년)당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권율 장군 집터에 500여 년 전 심어졌다고 알려진 은행나무가 보수 공사 중인 딜쿠샤와 이마를 맞대다시피 서 있는 모습. 자료 사진·조은 시인
딜쿠샤가 복원되기 전, 그곳이 대한매일신보 사옥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던 때, 나는 자주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곤 했다. 처음엔 멀리 보이는 권율 장군 집터의 거대한 은행나무에 끌려서 그리로 갔는데, 은행나무를 한참 올려다보고 나서야 그 집이 눈에 띄었다. 그 붉은 벽돌집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자마자 주인이 없는 그 집을 무단으로 점령해 살고 있는 열일곱 가구 때문에 이룰 수 없는 꿈임을 알았다. 지금도 세입자 신세지만, 그때 역시 집이 없던 때라 좋은 환경 속에 우뚝 선 그 집을 선점했던 자들을 조금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같이 산책하던 개를 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넓게 느껴졌고, 사람의 손길과 발길에 칠이 벗겨진 나무계단과 난간이 가장 먼저 눈길을 잡았다. 신문사 건물이었다고 알고 있던 터라 그곳에서는 등사기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공기 중에는 잉크 냄새가 떠도는 듯했다. 여차하면 컹컹 짖어댈 개가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름대로 엄격하게 분할된 공간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에 놀란 나는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끌림에 의해 나는, 어느 날 또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때는 건물 전체가 물에 잠긴 듯 조용했다. 이번엔 그 정적이 무서워 오래 있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광화문에 직장이 있는 사람들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리로 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들이 딜쿠샤로 간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조용한 골목에 쩌렁쩌렁 울리는 그들의 목소리 때문이다. 그들 뒤를 따라 이제 내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딜쿠샤를 향해 걷자니, 그 집의 역사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발길을 뒤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내 발자국과 테일러라는 한 인간의 발자국 위에 다시 나의 발자국을 올려놓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길을 꺾다가 내가 그동안 왜 그리로 전혀 발길을 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유라면, 유난히 눈에 띄는 모습으로 인왕산자락길을 걷던 한 사람 때문이었다. 좁은 산길에서 그 사람은 언제나 두 팔을 힘차게 휘저으며 나를 앞질러 갔다. 운동량을 늘리기 위한 의도였을 그 팔에 얻어맞을 때마다 나는 고꾸라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쯤 되면 걸음을 늦추거나 한 번쯤은 눈길을 줄 만도 했건만, 그 사람은 앞만 보며 얼음을 깨며 가는 쇄빙선처럼 거대한 모습으로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사라지곤 하던 지점이 바로 딜쿠샤 앞이었기 때문에 그 무렵부터 나는 그곳으로 일절 발길을 하지 않았다.
일상의 사소한 기억이 가로막고 있는 지점을 넘어, 한계점을 넘어선 듯한 기분으로 목적지에 닿았다. 역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행주대첩의 수장이었던 권율의 집터에서 오백 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은행나무다. 은행나무는 딜쿠샤와 머리를 맞대다시피 서 있다. 권율이 살던 집은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찍이 사라져버렸으나, 권율이 스무 살 무렵 식수된 은행나무는 세월을 이겨내며 장군의 기개로 뻗어가고 있다.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권율이 자신의 삶을 끝없이 재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사람의 발길이 향하고 있어 일찍이 보수공사가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딜쿠샤는 아직도 한창 공사 중이다.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일반인에게 개방될 거라고 들었던 터라 약간 허탈했다. 내게 길을 묻고 “마지막엔 우회전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던, 멀리서 찾아왔던 사람들은 나보다 더한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보수공사를 위해 쳐놓은 차단막 때문에 집은 실제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나만이 그 집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시선이 비밀스러워졌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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