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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9년 08월 09일(金)
운명 바꿔준 ‘詩의 뿌리’ 두평 쪽방… 마음 달래준 왕송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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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림 시인이 자기 시의 뿌리라는 그의 고향 경기 의왕시. 왕송저수지 옆에 레일바이크가 만들어지고, 전에 없던 분수도 생겼지만 의왕은 여전히 신현림 시의 출발이고 도착점이다.

시인 신현림의 의왕시

도깨비시장 길 입구의 고향집
2층 귀퉁이에 가건물로 지은
스물다섯살에 얻은 첫 내방서
본격적으로 詩 쓰기에 몰두해

해질 무렵 힘들고 쓸쓸한 마음
노을이 지는 저수지에 푹 담가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시간
고향 찾을 때면 꼭 향하는 곳


우리 집은 의왕역에 내리면 3분 거리였다. 도깨비시장 가는 길 입구. 지금 그 집은 없다. 이곳에 남은 20평에 집을 짓는 꿈과 추억만 남아 있다. 내 시의 뿌리는 내 고향 의왕에서 시작하고, 마무리된다. 내 시집마다 의왕은 곳곳에 스며있다. 첫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에 수록된 ‘철로변의 가을’ 시리즈의 시는 모두 의왕 얘기다. 서른 살에 독립선언 후 상경해서도 늘 철로가의 집 한 채와 부모님과 의왕 풍경을 그리워했다. 한 장소에 잠시 머물러도 그곳의 에너지가 깃드는데, 고향은 평생 함께 사는 자기만의 박물관이 아닐까 한다.

이 길에 서서 사라진 옛날 내 방을 떠올렸다. 창을 열면 수원행 전철 길과 의왕 역사와 철도화물기지의 수없이 많은 철로 길이 펼쳐져 있다. 그 철길은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내 가슴을 달래주고 서녘 하늘에 지는 노을만큼이나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다.

스물다섯 살 때 처음으로 내 방을 가졌다. 건축 허가가 안 나 2층 한 귀퉁이에 몰래 가건물로 지은 2평 방이라도 만족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워도 그 방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독서와 창작은 죽음만큼 어둡고 깊은 고독감을 신의 은총으로 바꿔가는 노력이다. 혼자만의 장소는 운명을 바꾸더라. 우여곡절 끝에 재수, 미대 중퇴, 입학, 유급 등 좌절감과 슬픔 속에 미래의 나를 펼쳐갔다. 길고 긴 재수 생활, 고향을 떠나 영양부족으로 이빨이 다 상하도록 가난한 다락방에 처박혀 시를 쓰던 30대. 우울증 끝에 습관이 된 불면증의 괴로움을 이기려는 눈물겨운 노력도 의왕에 깃들어 있다.

노을 지는 철도화물기지의 장엄함을 가슴 저리도록 기쁘게 맞이하곤 했다. 지금은 커다란 담장 길이 생겨 1층에선 장엄한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도시 살림과 건물도 많아졌다. 4형제가 다닌 의왕초등학교를 지나고, 철도박물관을 지나면 왕송저수지가 펼쳐진다. 전에 없던 분수도 생겼다. 지역경제를 살리려고 만든 레일바이크 철길을 따라 걸었다. 고향의 개발에 나는 반대했다. 하지만 처음보다 풀과 나무도 자라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어 조금은 안심했다.

▲  경기 의왕시 도깨비 시장 입구. 이 근처에시인의 옛집이 있었다.

의왕에서 쓴 시가 반이 넘는 첫 시집은 네 곳의 출판사로부터 러브 콜을 받았다. 출간 후 여러 신문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문학 잡지 두 군데서만 다뤄져 울분과 좌절에 파묻혔다. 그나마 이승훈 시인의 “황홀한 내면 풍경과 외로움의 미학과 특이한 매혹의 시”란 칭찬과, “거대한 내면을 지닌 이 불꽃 같은 시인에게 기대를 건다”는 서준섭 평론가의 평은 가슴에 작은 등불이 되었다. 좌절은 오기를 불렀다. 구름 속에서 소리치는 천둥처럼 거칠게. 세상이 아무리 이해관계로 얽혀졌더라도 실력으로 이기리라 믿고 공부했다. 공부할수록 일렁이는 햇빛, 상큼한 바람이 불어왔다

‘세기말블루스’는 홈런을 날렸고, 나의 삶은 바뀌기 시작했다. 차갑던 방에 불을 땔 때처럼 생에 따스한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촌 대학가의 큰 호응에 힘입어 출판사의 지속적인 광고. 그해 가을 많은 주간지와 12개의 여성 잡지에서 내 기사가 크게 다뤄졌다. 시집은 베스트셀러 1위를, 이후 스테디셀러로 나갔다. 이후 밀려드는 청탁으로 미친 듯이 작업을 하며 살림을 꾸렸다. 무엇보다 우울증 끝에 불면증…. 언제 그랬냐 싶게 푹신한 잠이 쏟아졌다.

그래도 인생은 위기와 극복의 끝없는 반복이더라. 어찌어찌하여 딸을 혼자 키우면서 험난했던 시간들은 십 년이 이어졌다. 누군가 아이 하나면 한 손으로 키운다는데, 나는 두 손으로도 모자라 늘 허덕였다. 세상이 바뀌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많이 뒤처져 있음에 많이 절망했었다. 그래도 전업작가로 출판사 계약은 이어졌고, 선인세 빚을 갚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해 생계를 이어갔다. 그나마 딸의 보들보들한 여린 살과 까만 눈과 눈빛은 내 힘든 생활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매일 함께 있는 시간이 짧았기에 조금이라도 엄마의 체온을 전하고 싶어 딸을 포대기로 두르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주말마다 찾던 의왕에서도 그랬다. 고향을 찾자마자 꼭 왕송저수지로 향했다. 많은 책을 읽거나 작품 구상할 시간은 없었으나 고향의 저수지가 있는 풍광 속에서 나를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딸을 자전거 의자에 앉혀 안전벨트를 묶고 나도 느슨하게 풀어두고 전화로부터의 구속이나 기대감도 없이 저수지가를 돌곤 했다. 해 질 무렵 힘들고, 쓸쓸한 마음을 노을 지는 저수지에 푹 담가 달래곤 했다. 작년 늦가을 영국출판사 Tilted Axis에서 선정한 한국 대표여성시인 9인에 포함된 나의 시 한 편이 이때 쓴 ‘술마시고 간다(I drink and go)’이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서러운 누군가를 위해

몹시 바람이 분다

우리의 숨결을 위해

신비한 힘이 흐르는 걸 느낀다

너는 따뜻한 물병 같아

깨질까 봐 조심조심 안고가지

어미 품속에서 너는 웃지만

까만 네 눈 속에서 나는 울고

바닷 속에서 시계도 울고

오래 전 사람이던 얼음물고기가 거리에서 녹는다.

(하략)



이 시의 저수지는 어둡지만, 왕송저수지는 꽉 막힌 듯 힘든 시간의 숨통을 뚫어주었다. 시집 ‘세기말 블루스’에 실린 ‘슬럼프에 빠진 그녀의 독백’ ‘나의 이십대’ ‘오백원 대학생’ ‘투사 아버지, 장의사 아버지’ ‘마지막 춤’ 등은 모두 왕송저수지 밖 들판을 생각하며 썼다.

입소문이 나서 젊은 친구들이 좋아한다는 시집 ‘침대를 타고 달렸어’는 나의 어머니 임종 전후의 내 생활이 많이 배여 있다. 엄마가 나와 자매들을 키우며 느꼈을 슬픔과 기쁨, 괴로움을 나도 겪고 있음에 엄마와 다시 이어지더라. ‘침대를 타고 달렸어’ 시집으로 의왕과 가족과 세계순례 시로 세계와도 이어진 넓은 시선을 갖게 되었다. 딸을 키우면서 엄마를 생각 안 한 적이 없었다. “우리 엄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떠올리면 가슴이 무너지곤 했다. 생각보다 삶은 길지 않고, 함께 하는 시간들도 정해져 있다.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은 추억을 가지려면 혈육이나 지인들과 관계를 단단히 재정립할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같이 이념충돌이 큰 시대는 더 그렇다. 좋은 관계는 서로 배우면서 성장하고 우리의 인생은 함께 함으로써 더 깊고 숭고해진다. 시를 쓰면서 더욱 그걸 깨닫는다.

천천히 레일바이크 철길을 지나 도착한 왕송 연꽃 습지에는 연꽃들이 피어있었다. 택시로 20분이면 다 돌만치 그리 크지 않지만, 보석같이 빛나는 의왕의 왕송저수지요 들판이다. 문득 국제통화기금(IMF) 시절엔 내 작업을 도와주시려고 함께 다녀준 아버지 생각이 났다. 초평동의 들과 산, 온 천지에 하얀 안개가 흐르고, 성에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해가 떠서 구름을 휘감았다. 지금도 그 아름다움은 그대로였다. ‘침대를 타고 달렸어’ 속 시 구절을 하늘에 띄워본다.



슬프고 가난할수록 꿈의 트럼펫을 불며 가야지

너무 늦었어, 너무 나이를 먹었어

쉽게 선을 긋는 말을 버려

감각의 종이란 종 다 울리고

좀 더 다르게 살기를 바라야지

배우고, 보고, 느낄 것들이 많아



거긴 캄캄해

해님 다섯 개 더 보내 줄까



군부독재 시절 36년을 야당에서 투쟁하며 의원직을 한 번 하셨던 아버지 삶에 얽매인 혼란스럽고, 고단한 가족사. 그래서 나는 시대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야당도 여럿으로 나뉘어 중도 보수로 흘러간 세력 등 그야말로 하나로 딱 말하기 복잡해진 시대가 되었다. 창작이란 동 세대들의 관심, 감성, 고뇌의 총체다.

그리하여 시대와 인생의 고뇌를 담는 그릇인 시집들. 이후 ‘반지하 앨리스’와 ‘사과꽃 당신이 올 때’. 내년에 나올 신작 시집까지. 시를 써낼 때마다 혼을 불사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사랑처럼 정성을 다하고 싶다. 지금까지 헝그리정신이 나를 버티게 했고 나를 내일의 먼 길로 떠밀고 간다.

글·사진=신현림

시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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