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文정부 ‘국치(國恥) 외교’ 자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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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논설위원

국제 정세에 무지해 國權상실
준비 없이 맞은 광복 분열 깊어
시대변화 모르는 집권층 위험

美 대중정책, 관여서 압박으로
아베, 미·일 同盟 강화로 대응
시대착오적 親中·親北 버려야

8월은 국가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오는 29일은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를 잃은 국치(國恥)일이고, 지난 15일은 그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이다. 보름쯤을 사이에 두고 국권 상실의 쓰디쓴 슬픔과 되찾은 기쁨을 맛보게 되는 8월은 그런 의미에서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국권이 타국에 넘어가며 전 국민이 일제의 신민이 됐고, 이후 35년 만에 해방된 역사를 되새긴다는 것은 국민 입장에선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과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의 공통점은 국제 정세에 무지한 상태에서 졸지에 맞은 것이라는 점이다. 대한제국은 국제적 고립 상태에서 일본제국에 강제병합됐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영·중·러의 영향력을 차례로 배제한 뒤 병합을 강행했다. 당시 위정자들은 한반도 주변 정세 변화에 대해 무지(無知)했다. 광복도 마찬가지였다. 사상가 함석헌(1901∼1989)이 “해방은 도둑처럼 생각지도 않게 찾아왔다”고 했을 정도로 누구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채 준비 없이 그날을 맞았다.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일본 게이오(慶應)대 명예교수는 최신작 ‘한반도 분단의 기원’에서 “카이로 선언에도 불구하고 해방=독립이라는 등식은 존재하지 않았다”면서 “2차대전 중 미국이 구상해 영·중·소 동의를 얻었던 계획은 한국의 즉각 독립이 아니라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였다”고 썼다. 좌우 지도자들은 국제사회의 한반도 전후처리 논의에 무지했고 신탁통치에 대한 즉자적(卽自的)인 찬반 대립으로 분열을 키웠다. 이 결과 가능한 지역부터 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없어 분단이 기정사실화됐고 북한은 통일을 명분으로 6·25 남침을 했다. 오코노기 교수는 “독립을 달성하려면 통일이 불가능해지고, 통일을 실현하려면 전쟁이 불가피해지는 상황에서 지도자들은 분열했다”고 결론지었다. 해방 정국에 대한 오판이 6·25와 분단 고착으로 이어진 셈이다.

문제는 광복 74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집권층의 국제정세 무지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 미국은 미·중 전략 경쟁을 전면화했다. 대중 관여 정책이 중국만 키워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 되면서부터 미국에선 대중 협력파가 퇴조하고 있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친중파로 규정돼 영향력을 잃었다. 반면 중국 관련 업무를 맡았던 국무부와 국방부, 재무부의 전직 관료들은 대부분 중국이 군사·경제·기술·이데올로기 면에서 도전하고 있는 만큼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를 위해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진영의 전략가 스티븐 배넌은 중국 공산당을 전복해야 한다는 극단론까지 펴고 있다. 무역 불균형에서 촉발된 미·중 갈등이 화웨이 문제에서 5G 이동통신 기술 주도권 대립으로 확산된 데 이어 환율전쟁,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파기 후 중거리미사일 아시아 배치 논란 등으로 전방위 확산되는 이면엔 미국의 대중 전략 변화가 깔려 있는 셈이다. 미국의 기류를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더라도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에 대한 압박 정책은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아베 신조 (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이 같은 미국의 대중 정책 변화를 간파한 뒤 미·일 동맹 강화로 선제 대응하고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한 채 폐기 상태에 놓인 대중 관여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문 정부는,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해야 할 나라라는 이유로 중국을 거스르는 정책에 대해선 선을 긋고 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선 “대중 봉쇄”라며 거부하고, 화웨이 장비에 대해선 “안보 우려가 없다”고 면죄부를 주고 있다. 또, 미국의 핵 공유 협정 제안에 대해서도 안보를 우선시하기보다는 북·중의 심기부터 살피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엔 ‘평화경제’로 나가기 위해 한·미·일 협력보다 남·북·중 연대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평화경제는 친북·친중 관성에 따른 관념적 구상일 뿐이다. 더구나 미·중 전면 충돌시대엔 현실화 가능성도 희박하다.

문 정부는 미·중 전략 경쟁시대의 본질을 제대로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외교·안보 정책 좌표를 새로 설정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109년 전 국치 때나 74년 전 광복 때처럼 또 시대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