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한국 외교 大計도 小計도 없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신보영 정치부 차장

지난 8월 초 한국 주재 4강 중 한 국가의 고위 외교관을 만났다. ‘6·30 미·북 판문점 회담’과 7월 1일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규제 조치로 국내에서 ‘외교 위기’ 우려가 쏟아지던 시점이었다. 이 외교관은 “한국의 국가 대전략이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했다. 본국에 한국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의 장기적 목표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하소연이었다. ‘북한 바라기’ 외에는 뚜렷한 정책 목표가 보이지 않는데, 한국의 궁극적인 대북정책 목표마저도 ‘통일’인지, 평화공존을 바탕으로 한 ‘남북연합’인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었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국가 목표는 문 대통령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정도다. “늦어도 2045년 광복 100주년에는 평화와 통일로 하나 된 나라(One Korea)’라는 비전도 이때 처음 나왔다. 일종의 방법론인 ‘평화경제론’도 지난 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와 광복절 경축사, 지난 19일까지 3차례 문 대통령이 언급하면서 집권 2년 3개월 만에야 완성됐다. 2012년 12월 집권 뒤 ‘정상국가’로의 수순을 착착 밟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나 ‘2049년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 건설’을 목표로 움직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보다 한참 늦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일종의 자국 이기주의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견줘도 늦은 감이 적지 않다.

한국의 국가 대전략, 또는 외교 비전의 부재는 사실 ‘정체성 혼란’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다. 중·일과 미국이 일찌감치 비전을 내세우면서 재빨리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정치에서 자국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한 뒤 방향을 설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은 전후 74년간 담당했던 ‘경찰국가’라는 레벨을 뗐고, 중국은 미국에 맞서는 신흥 강대국 지위를 받아들였다.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일본도 ‘중간국’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지만, 한국은 현재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물론 국내 학계와 외교가에서는 한국의 정체성과 향후 외교 비전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다. 현재 논의되는 안 중에는 ① 중견국 ② 중간국 ③ 중립국 등이 있다. 구한말 이후 다시 지정학이 100여 년 만에 귀환한 지금, 세계 경제 규모 12위 국가라는 위상을 활용한 외교적 공간을 창출하자는 전략이지만 각자 한계도 명확하다. 박근혜 정부에서 ‘MIKTA(멕시코·인도네시아·한국·터키·호주)’ 협의체 구성으로 대표되는 ① 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존재감이 없어졌다.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가 주창하는 ③ 에는 구한말 고종의 ‘영세중립국’ 추진 실패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사석에서 제시한 ② 에는 일본이 포함되면서 현재 경제전쟁 상황까지 치달은 한·일 관계 복원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① → ② → ③으로 가는 과정을 밟든, 아니면 한꺼번에 ‘3중(中)’ 전략을 취하든 뭔가 필요하다. 문 대통령의 비전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외부 도전에 대한 수동적 대응이 아니라 능동적 외교의 문을 여는 대계(大計)의 시작점이 되길 기원한다.

boyoung2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