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김순기 ‘게으른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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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논설고문

‘잘 보기 위하여／ 잘 읽기 위하여／ 잘 생각하기 위하여／ 잘하기 위하여／ 안경을 쓸 필요가 없다／ 생각도 그림도 다 아니다／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는 것도 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오／ 밖에 있는 것도 아니오／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그냥 그것이다／ 그냥 게으른 구름이다／ 그냥 모습, 그냥 색깔, 그냥 소리.’ 특정 장르의 작가로 규정할 수 없는 세계적인 멀티 예술가 김순기(73)의 시 ‘게으른 구름’이다. 평론가 정과리가 “김순기 글과 그림의 미학적 원리를 ‘서행(徐行)의 도약’이라고 정의하고 싶다”고 한 이유를 잘 알게 한다.

김순기는 서울대 미대를 1970년 졸업하면서 첫 설치 작품전 ‘소리’를 연 뒤 프랑스 유학을 떠나 니스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했다. 니스 국립 장식미술학교, 마르세유 고등미술학교, 디종 국립고등미술학교 교수 등을 지내기 전인 1975년 그가 서울의 미국문화원에서 종이 위에 단어 ‘어제’ ‘오늘’ ‘내일’을 쓰는 퍼포먼스 등을 펼친 ‘김순기 미술제’부터 한국 미술계에 큰 충격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풍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믿은 그는 “영원히 존재할 사물을 남기기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찰나, 곧 사라질 순간을 포착하고, 그 속에 온전히 머물러서 존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국제적 전위 음악가인 존 케이지,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 등 예술 동료들을 초대해 1986년 6월 25일부터 10일 동안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 김순기와 그의 초청자들’ 제목의 퍼포먼스·전시·토론·파티 등 세기적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프랑스를 거주지로 삼아 세계를 누비며, 영상·설치·회화·드로잉·서예·로봇 등을 통해 예술·철학·과학이 접목된 새로운 미술 언어를 끊임없이 실험해온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 ‘게으른 구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난 8월 31일 개막해 내년 1월 27일까지 이어진다. ‘일기’ ‘조형상황’ ‘색 놀이’ ‘빛의 길’ ‘만 개의 더러운 먹물 자국’ ‘준비된 피아노’ ‘가시오, 멈추시오’ ‘하늘 땅, 손가락’ ‘O, O, O’ ‘바보 서예’ 등 많은 작품을 통해 그의 끝 모를 창의력과 예술혼을 만날 수 있는 귀한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