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눈 온 크리스마스, 잠든 나를 깨워 ‘보름달 빵’ 주신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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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순(1922~1998)

1남 3녀 중 장녀인 나는 고사리손으로 동생의 기저귀를 빨고, 포대기에 동생을 업어 종종대며 놀았었다. 막내는 나와 9살 차이고, 남동생은 종갓집의 장손이니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그런데 첫째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양보하면서 살아온 나는 서운함이 마음속에 응어리 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식 둘을 낳아 키워 보니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됐다. 부모님도 나를 기르실 때 아픔, 사랑, 행복을 많이 느끼셨음을 안다. 이젠 동생들도 성인이 돼 오히려 나에게 도움을 줄 때가 많다. 친정집은 명절 때는 물론이고, 항상 활기가 넘치고 에너지가 흐른다. 그러다 보니 친척들이 질투 아닌 질투를 하신다.

나는 부모님 사랑보다 할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바로 아래 여동생과 1살 차이라 분유도 먹지 못하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긁어주시는 사과를 먹고 자랐다고 한다. 그 뒤부터 줄곧 한방에서 중학생 때까지 할머니 품에서 컸다. 초등학생 때는 소풍이든 운동회든 부모님보다 할머니께서 더 많이 오셨다. 오죽하면 친구들에게 할머니가 나의 엄마라고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10살 무렵으로 기억되는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오실까 하는 궁금함에 잠을 자지 않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자고 있어야 산타할아버지가 오셔”라고 하셨다. 그래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동생과 겨우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가 우리를 흔들어 깨우셨다. 영문도 모른 채 실눈을 떠 겨우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작은 벽장문을 살며시 열어 노란 보름달 빵을 두 손 가득 꺼내 주며 말씀하셨다. “산타할아버지 방금 가셨어.” 나는 그 소리에 놀라 혹여 산타할아버지의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까 방문을 잽싸게 열었다. 하늘에는 노랗고 둥근 보름달이 떠 있고 마당과 지붕 등에는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려앉아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세상은 온통 솜털처럼 부드러워 보였고 한 폭의 멋진 그림 같았다. 동생과 나는 아쉬움을 잊고 빵을 한입 베어 먹었다. 그 빵은 어떤 빵보다도 훨씬 맛있었다. 또한 값비싼 장난감보다 더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 갑자기 할머니가 나의 곁을 떠났다. 그날 아침 “영희야, 굶지 말고 아침에 사과 한 쪽이라도 먹고 가”라고 하신 말씀이 마지막 유언이 될 것이라 누가 생각했을까? 할머니께 대답도 하지 않고 뭐가 바쁘다고 서둘러 문을 나선 나 자신에게 한없이 원망을 퍼부었던 날이기도 하다.

가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보름달 빵을 보면 크리스마스에 받았던 할머니의 보름달 빵이 생각난다. 그래서 그런지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보름달 빵을 보게 되는 날은 할머니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리고 그리움을 빵을 먹으며 달래곤 한다. 가끔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노란 보름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름다웠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추억에 빠져 눈물이 몽글거린다. 하늘에 계신 할머니께 나중에 찾아뵙는 날, 이승에서 할머니의 바람처럼 반듯하게 자라 행복하게 잘 살다 왔다 전하고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맛있는 보름달 빵을 나눠 먹고 싶다.

외손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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