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혈관’ 전세계로 잇기…‘수송보국 DNA’ 되새긴다

  • 문화일보
  • 입력 2020-03-0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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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73년 5월 16일 보잉 747점보기 태평양 노선 취항식에서 조중훈(왼쪽 네 번째) 회장이 김종필(〃 세 번째) 당시 국무총리 등 정·재계 인사들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한진그룹 제공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탄생 100년… 다시 주목받는 경영철학

트럭 한대로‘한진상사’설립
‘신용,사업의 근간’믿음 실천
한국전쟁 후 회사 재건 성공

국익차원 대한항공공사 인수
1969년 항공사업에 뛰어들어
1977년 컨 전용 해운사 세워

‘기업이 인재 양성’평생 신념
학교시설 확충·교육향상나서
사재1000억 공익재단등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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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조중훈(趙重勳) 한진그룹 창업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수송보국(輸送報國·수송으로 조국에 보답한다)’ 경영 철학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조 창업주는 1945년 11월 1일 인천에서 한진상사를 창업했다. 이후 수송보국 정신 아래 대한항공공사와 한진해운을 인수했다. 수많은 업종 중에서도 그가 수송·물류업을 택한 이유는 수송과 교통은 인체의 혈관처럼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산업으로, 우리나라 산업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의 수송보국 경영 철학은 당시 부실기업이었던 대한항공공사와 한진해운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대한항공공사 인수 당시 “밑지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사업이 있다”며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고 했다. 한진해운 인수 때는 “타산적인 차원으로 관계자들의 고뇌와 업계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언급했다. 인수 과정에서 눈앞의 단기적 이익에 치중하기보단,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그의 신념이 우선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 창업주의 이 같은 수송보국 경영이념은 고 조양호(趙亮鎬) 선대 회장을 거쳐 현재 조원태(趙源泰) 한진그룹 회장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오며 한진그룹의 ‘핵심 DNA’로 자리 잡았다.

◇어린 시절 고난 속 견문 넓힌 조 창업주 = 조 창업주는 1920년 2월 11일(음력)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조명희(趙命熙) 선생과 태천즙(太天楫) 여사의 4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0대째 서울 토박이로 살아온 가문에서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부친이 운영하던 직물점이 1930년대 후반 대공황과 화재로 부도를 맞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가세가 기울자, 그는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국비 교육기관이었던 경남 진해의 해원(海員) 양성소로 옮겼다.

기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조 창업주는 2년 만에 해원 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 고베(神戶)에 있는 조선소 수습생으로 발탁돼 열일곱 어린 나이에 해외로 갔다. 조 창업주는 주경야독(晝耕夜讀) 격으로 낮에는 조선소에서 기술을 익히느라 쉴 틈 없이 일하면서도 밤에 하숙방에 돌아와선 책을 놓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헌책방에서 고서를 빌려 침을 발라가며 읽다가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1940년 조선소 수습 기간을 마치고 일본 운수성으로부터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받은 그는 일본 화물선을 타고 중국 상하이(上海), 홍콩(香港), 동남아시아 등으로 항해했다. 세계 문물을 익히고 견문을 넓힌 좋은 기회였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88년 8월 27일 제주에서 열린 대한항공 DC-10 특별기로 봉송한 성화 점등식. 한진그룹 제공


◇트럭 한 대로 시작한 한진상사…‘신용’의 힘으로 =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는 생기를 되찾았다. 인천항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건너온 운동화와 양복, 밀가루 등 생필품이 넘쳐났다. 같은 해 11월 11일 조 창업주는 이연공업사(1942년 귀국 후 창업했으나 태평양 전쟁 영향으로 정리)를 정리할 당시 받은 보상금과 그간 저축한 돈을 합쳐 트럭 한 대를 장만해 인천 중구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한진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사업으로 우리 민족을 잘살게 하겠다”는 창업 신념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진상사는 해방 직후 혼돈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했다. 2년 만에 화물자동차 10대를 보유했고 1947년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도 정식으로 받았다. 그는 신용이 사업의 근간이라고 굳게 믿었다. 빌린 자금의 상환 일정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상사는 사업 개시 5년 만에 종업원 40여 명, 트럭 30여 대를 보유한 회사로 성장하게 됐다. 하지만 또다시 전쟁의 타격을 받았다. 조 창업주가 서른 살 되던 해 발발한 6·25전쟁으로 차량과 장비들이 모두 군수물자로 동원돼 뿔뿔이 흩어졌다. 1953년 봄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그는 인천으로 돌아와 폐허가 된 땅 위에 임시 건물을 세우고 피란 때 몰고 간 트럭 한 대로 밤낮없이 회사 재건에 나섰다. 그가 사업의 근간으로 삼았던 신용은 이때 힘을 발휘했다. 신용으로 투자자들에게 무담보 대출을 받았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조중훈 창업주가 제주 정석비행장에서 조종훈련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한진그룹 제공


◇땅에서 하늘로 사업 확장 = 한진상사는 1957년 1월 자본금 1000만 환의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1959년에는 ‘대한민국 경제 1번지’인 서울 중구 소공동 반도호텔에 사무실도 열었다. 1960년 한 해에만 22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고 500대의 차량을 보유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때 한진상사는 땅을 넘어 하늘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에 이른다. 1960년 8월 15일 조 창업주는 ‘수송보국’의 꿈을 하늘로 넓히겠다는 일념으로 4인승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주식회사 한국항공’ 설립 신고도 냈다. 1961년 2월엔 40인승 항공기를 추가로 사들여 서울∼부산 노선을 오갔다. 다만 당시 정부가 민영인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전폭 지원하면서 하늘 사업의 꿈은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대신 1961년 8월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사들여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한진 고속의 시초다.

◇육·해·공 종합 수송그룹으로 발돋움 = 조 창업주는 그간의 경험과 자금을 토대로 1960년대 말부터 사업을 크게 확장한다. 1967년 7월 자본금 2억 원으로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창립했고 그해 9월 베트남에 투입된 인원과 하역장비, 차량, 선박 등에 대한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1968년 2월엔 ‘한국공항’, 8월에는 ‘한일개발’을 각각 설립했으며 9월에는 ‘인하학원’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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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69년엔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항공사업에 뛰어들었다.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이고,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게 아니겠소.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 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오”라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간곡히 권유한 끝에 조 창업주가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대한항공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1973년 10월 발생한 중동전으로 국제유가가 항공사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치솟았다. 당장 500만 달러가 필요했던 그는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 은행에 도움을 요청했고 업무상 인연을 맺은 로제 총재에게 지불 보증을 부탁했다. 쉽지 않은 부탁이었으나 로제 총재가 뜻밖에 승낙, 드디어 사업에 숨통이 트였다.

1977년 5월 그는 육·해·공 수송그룹 완성을 위해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한진해운은 당시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를 토대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1987년 11월에는 만성적자였던 ‘대한선주’를 인수, 한진해운과 합병하면서 인수 2년 만에 경영 정상화를 이뤄냈다. 한진해운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그는 조선 사업에 눈을 돌렸다.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던 조선공사 매각 입찰에 참여해 인수했고 1989년 5월 ‘한진중공업’을 출범시켰다.

◇인재양성 등에 사재 털어 지원 = 조 창업주는 사회 복지 증진을 위해 기업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1968년 인하학원을 인수했고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를 인수, 학교시설 확충과 교육의 질적 향상에 나섰다. 1988년엔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의 기회를 얻지 못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국내 최초 사내 산업대학인 한진 산업대학(현 정석대학)을 개설해 직원 교육 기회를 마련했다. 생전에 모은 사재 중 1000억 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부하고 그중 500억 원은 수송·물류 연구 발전과 육영사업기금에 쓰기도 했다.

곽선미 기자 gs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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