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중 중종의 묘소인 정릉. 홍살문에서 시작된 신로(神路)와 어로(御路) 끝에 정자각이 배치돼 있고 그 뒤가 능이다. 게티이미지뱅크
■ 역사인물학
박현모의 한국형 소통이야기 - ⑨ 우유부단한 중종
연산군 폐위뒤 19세에 갑자기 왕위 올라 39년 재위…공신·언관에 둘러싸여 “일을 한 실상이 없다” 후대 평가
‘조광조 개혁’ 수용했으나 기득권 반발에 무산… 후계 구도까지 안정된 말년에도 주변 눈치만 살펴
“인자하고 유순했으나 결단력이 부족했다. 무언가 해보려는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조선의 11대 국왕 중종(中宗·1506∼1544년 재위)에 대한 사관(史官)의 최종평가이다. 결단력이 없고 일을 해낸 실상이 없었다는 말보다 정치가에게 더 치욕적인 게 있을까? 중종이 그렇게 된 연유에 대해서 사관은 “우유부단해서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임용한 것”을 꼽았다. 사람을 쓰고 내치는 방법을 몰라서 39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지만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는 얘기다.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이 중종에게는 억울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는 성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종친의 한 사람으로 무난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낙천(樂天)’이라는 또 다른 호칭(字)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수긍하고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런 그를 박원종 등 ‘반정 주동자’들이 “인덕(仁德)이 있어 민심이 쏠리고 있다”면서 연산군 말년에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했다.
19세의 나이에 일방적으로 추대(推戴)된 중종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삼대장(三大將)’으로 불리는 세 명의 반정 주동자들이 내렸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의 삼대장이 조회 자리에 나가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야 하는 왕이었다. 117명이나 되는 반정공신을 책봉할 때 중종은 겨우 한 명을, 그것도 나중에 추가해 올릴 수 있었다.
허수아비 왕 노릇을 끝낼 기회는 재위 7년 무렵에야 찾아왔다. 재위 5년부터 7년 사이에 ‘삼대장’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중종에게는 또 다른 강력한 견제세력이 있었다. 오로지 남의 작은 잘못을 찾아내 논박하고 탄핵하는 것(彈駁)만을 일삼는 언관이 그들이었다. 언론 삼사, 즉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리들은 연산군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주춤하는 듯했으나, ‘추대된’ 왕 앞에서 다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언관의 비판 대상은 주로 고위직 관리들의 부정 축재(蓄財)와 사사로운 인사권 행사였다. 반정공신 등 고위 관리들은 자녀를 관직에 임명하기 위해 서로 청탁하곤 했다. 언관은 그것에 대해 강력하고도 지속적으로 탄핵 상소를 올렸다. 같은 내용의 상소를 하루에도 열 번이나 올리면서, 몇 달 동안이나 해당 관리를 교체하라고 요구하는 통에 국정이 마비되는 일도 벌어졌다. “왜 언관들은 공격만을 일삼고 사람을 쓰고 내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가”라는 중종의 개탄은 그런 상황에서 나왔다.(중종실록 9년 4월 10일)
재위 중반에 조광조가 발탁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랏일에는 소홀하고 사사로운 이권 챙기는 데만 열심인 대신들과 지엽적인 데만 매달리는 언관 모두를 뛰어넘을 수 있는 참신한 인재가 필요했다. 재위 10년째가 되는 1515년에 중종은 과거시험 문제로 ‘공자께서 내게 정치를 맡기면 일 년이면 다스림을 기대할 수 있게 하고, 삼 년이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했는데, 과인이 나라를 다스린 지 십 년이 됐지만 나라의 기강이나 법도가 아직도 정해지지 않았다’면서 그 해법을 물었다.
이때 조광조가 쓴 답안이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34세로 중종보다 여섯 살 위인 조광조는 그 해법으로 ‘공감’과 ‘위임’이라는 두 단어를 제시했다. 나라 다스리는 일이 복잡한 것 같지만 그 요체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먼저 왕이 정치 비전을 잘 공감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게 조광조의 말이었다.
‘천하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왕이) 제시해서(以共天下之道)’ 신민들의 ‘마음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군주가 ‘성실하고 정성스러운 자세’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마음을 감화시켜야 한다(感之而化其心).’ 공자가 일 년이면 다스림을 기대할 수(可) 있게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비전 공감을 말한 것이라는 게 조광조의 해석이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장명등, 혼유석 등으로 둘러 싸인 중종의 능침. 문화재청 제공
다음으로 성과를 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대신을 공경하고 일을 믿고 맡겨야 한다’였다. 임금이 할 일은 국가의 중심에 서서 좋은 인재를 발탁해서 적합한 자리에 임명하는 것이다. 임금이 나서서 일일이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대신들에게 위임해서 결과로써 책임지게 하면 된다. 인재들로 하여금 ‘조선은 임금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 나라요 내 후손의 나라’라는 신념으로 일하게 하면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서고, 법도가 자리 잡혀서’ 3년 안에 충분히 성과를 거두리라는 게 조광조의 결론이었다.
중종은 실제로 조광조의 말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昭格署)라는 기관을 폐지했으며, ‘소학’ ‘속(續)삼강행실’ ‘신증(新增)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을 펴냈다. 유교적 문명사회로 조선의 백성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은 전국에 향약을 설치하는 조처로도 나타났다. 무엇보다 중종은 현량과(賢良科)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유능한 젊은 인재 28명을 뽑았다. 나랏일의 큰 방향(大體)을 헤아리며 말할 수 있는 언관, 국사(國事)를 잘 경영하는 유능한 대신들을 배출할 길을 터놓은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아쉬워하듯이,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4년간의 실험’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조광조 등 ‘기묘제현’(己卯諸賢·기묘년인 1519년에 조광조와 함께 숙청당한 사람들)의 파당성 때문일 수도 있고, 왕의 불안감을 파고든 ‘소인배들의 농간’ 때문일 수도 있다. 문제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감만 잔뜩 키우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난 추대된 왕에 대한 실망이었다. 왕의 부추기는 말만 믿고 헌신하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은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이 느끼는 배신감은 더욱 심각했다.
중종 후반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언론의 타락은 그 후유증이었다. 대신들은 ‘일을 건의해 밝히려는 의욕을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자리를 보전하는 것(無一事建明 徒知保位)’에만 급급했다. 언관들은 권력자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대신 김안로 등 권간(權奸)의 정적을 패몰시키는 정치도구로 전락됐다. “위아래가 눈앞의 편안한 것만 즐겨 인습대로 구차하게 살아가면서 점점 어지럽고 망하는 지경에 빠져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이언적의 상소는 이런 상황을 지적한 것이었다.(중종실록 34년 10월 20일)
중종도 신민들의 실망과 불신을 인식하고 있었다. 재위 33년째가 되는 1538년에 그는 느닷없이 “태종께서 세종에게 전위하신 해가 무술년이었는데 금년이 마침 무술년”이라면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했다. 왕의 선위(禪位) 의사를 신하들은 즉각 반대했다. 대신들은 “자칫 험악한 일이 많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중종실록 33년 10월 2일) 신하들의 만류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척하며 그 자리에서 선위를 취소한 중종은 그 후로 5년이나 더 ‘실상이 없는 다스림’을 이어갔다.
‘중종실록’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잃어버린 5년’이 무척 아쉽게 느껴졌다. 집권 초반기에 그는 꼭두각시 왕 노릇을 감내해야 했고, 중반기에도 시행착오를 겪은 것으로 눈감아 줄 수 있다. 하지만 재위 32년 이후, 특히 마지막 5년은 중종 자신의 말대로 권간도 제거됐고 왕위 후계자(세자) 역시 잘 자라고 있었다. 그야말로 만나기 어려운 기회(難逢)를 맞이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연산군의 정치를 욕하거나, 비망기(備忘記)나 밀지(密旨)를 승지들에게 보내 신료들의 동향을 살피게 했다. ‘제2의 조광조’나 ‘또 다른 김안로’가 등장하지 않을까 벌벌 떨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꾀해야 할 때”라고 해놓고 기껏 한 말이 세자 보필을 잘해 달라는 당부였다.
중종이 만약 ‘일을 한 실상이 없는 군주’라는 치욕을 모면하려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용인(用人)의 방법을 몰라서 40여 년의 세월을 성과 없이 허비했다는 비난을 피하려면 집권 후반기에 무엇을 했어야 했을까?
그 해답은 그가 늘 따라 하고 배우고 싶다(法世宗)던 세종에게 있지 않을까? 세조 때 폐지됐던 집현전의 복원이 그것이다. 세종이 왕위에 올라 5년 동안 정성을 기울였던 집현전이야말로 대체(大體)를 헤아리며 말하는 언관, 일 잘하는 대신들을 배출하는 최고의 인재양성소였다.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중장기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그 전략을 실천할 인재를 기를 수 있는 집현전 같은 싱크탱크를 만드는 데 중종이 주력했더라면 어땠을까? 이제 총선도 끝났고, 문재인 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해야 할 과업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코로나19 이후 대한민국호(號)가 나아갈 전략을 수립할 21세기형 집현전이 아닐까? 마침 며칠 전 4월 28일은 세종이 집현전을 설립한 지 600년이 되는 날이었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 용어설명
집현전의 설립과 폐지 : 집현전은 세종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당나라 때 이미 같은 이름의 관청이 있었고, 고려 인종 때 우리나라에도 도입됐다. 하지만 그것은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는’ 제도에 불과했다. 그런 집현전을 세종은 즉위한 지 4개월 만인 1418년 12월 12일(양력 1419년 1월 7일)에 실제로 설치하라고 지시했다.(법령 마련) 그로부터 113일 뒤인 1420년(세종2) 3월 16일에(양력 4월 28일) 집현전은 전담 관원 10인으로 출발했다.(설립) 집현전은 37년간 운영되다가 1456년(세조2) 왕명으로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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