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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20년 05월 20일(水)
김덕수 “서양은 분박, 우리는 신명… 나눔·상생이 전통가락의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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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수 명인이 지난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연습실에서 ‘김덕수전’을 연습하던 중 사물놀이 공연을 재연하며 흥에 겨워 추임새를 넣고 있다. 김낙중 기자
■ 음악극 ‘김덕수傳’ 앞둔 김덕수 명인

손끝서 어깨까지 사뿐사뿐 춤사위… 보법으로 일치하면 둥글게 감기는 맛
‘天·地·人’이 다 들어있는 혼합박에 서양음악 전공자들도 감탄

‘사물놀이’의 탄생은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것
국내외 제자들 교육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선배 예인들의 은혜 보답한다는 뜻


음악극 ‘김덕수전(傳)’이 오는 28일부터 4일간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른다. 이 음악극은 김덕수(68) 사물놀이 명인의 생애를 다룬다.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아티스트 라운지에서 만났을 때, 김 명인은 환하게 웃으며 친근감을 표했다.

“문화일보는 창간 때부터 눈여겨봤어요. 제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의 부군께서 재직하고 계셨거든요. 그런 인연이 있는 데다가 특별히 석간신문이니 매일 기다려집니다. 모바일로 뉴스를 보는 시대이지만, 쓰레기 뉴스를 걸러내려면 역시 신문을 봐야 합니다.”

이렇게 말문을 연 그는 시종 유쾌한 어조로 얼음에 박 밀듯이 술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지루한 법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희로애락이 고루 담겨 있는 인생 서사를 전하며, 흥겨운 장단과 춤사위를 곁들여 굴곡의 율동을 만들었다. 자부와 회한이 섞인 개인사가 대하장강으로 달려가며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이야기 산맥과 만나고, 그가 63년 외길을 걸어온 전통 연희는 오늘 우리가 보듬어야 할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로 우뚝 되살아났다.

―김덕수전에 대한 감회가 크겠군요.

“제가 어느덧 70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주위 분들에게 감사하고 영광스럽지요. 홍길동전, 춘향전도 아닌 김덕수전이라니 중압감이 있지만, 젊었을 때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의미도 있어요. 제가 평생 새로운 거에 도전해왔으니까요.”

김덕수전은 현대차정몽구재단이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의 하나로 세종문화회관과 함께 만드는 음악극이다. 이 프로젝트는 작년에 안숙선 명창의 이야기 창극을 무대에 올린 데 이어 이번에 두 번째로 김 명인 이야기를 다룬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극본을 쓰고, 연극계 장인으로 꼽히는 극단 골목길 박근형 대표가 연출을 맡았다.

―개인사를 통해 시대사가 보이는 구성이라던데, 남사당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오더군요.

“우리 역사에서 남사당패는 서민 백성들의 슈퍼스타였어요. 시대를 풍자하며 아픔과 슬픔을 달래주고, 한과 분노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으니까요. 저는 어렸을 때 남사당과 함께 마을에서 마을로, 마당에서 마당으로 다니며 전통 연희를 익혔습니다. 흔히들 저를 장구만 치는 사람인 줄 알지만(웃음), 유년기에 다양한 것들을 배웠어요. 남사당 마당이 제 놀이터이자 공부 장소였습니다. 하루 종일 줄도 타고, 인형도 만들고, 재담과 탈춤도 하고…. 세월이 흘러 1960년대에 ‘국산품이동선전반’으로 악단과 함께 전국을 다녔어요. 기억하시지요? 차력과 함께 약을 팔던 모습. 그때 악단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보여줬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지요.”

그는 국악예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왔고, 그때부터 정규 예술교육을 받았다. 수출로 나라의 살길을 만들려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에 그는 한국민속가무예술단, 리틀엔젤스예술단 일원으로 해외 공연에 참여한다.

“중학교(국악예술학교) 1학년 때 한국가무예술단으로 해외에 처음 나갔어요. 그때 예술단에 계셨던 우리 선생님들, 참 전설 같은 분들이 많으셨어요. 만정 김소희, 향사 박귀희, 지영희(피리연주가), 신쾌동(거문고연주가)…. 그분들이 만드신 예술단이 불란서 파리에서 있었던 세계민속예술대회에 나갔는데, 그게 해외 예술단 1호라고 알고 있어요.”

최초의 한류 글로벌 문화사절단으로 활동했다는 자부심이 그의 얼굴에 역력했다. 그는 여기서 국악예술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양성했던 박귀희 등 선배 예인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그분들이 교육기관을 만들었기에 오늘 저희가 있는 거죠. 제가 전통 연희 교육에 힘쓰고 있는 것은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는 리틀엔젤스예술단을 창단해 세계 순회공연을 했던 고 박보희 이사장의 공로를 오늘 시점에서 크게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최빈국이던 그런 시대에 세계를 누비며 우리 전통문화를 알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1970년대 유신정권 시대에 그는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농악을 전수했다. 마당 풍물패 탈춤이 저항문화의 상징이 됐던 시기였다.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우리 같은 광대들이 백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해방 운동의 앞에 서 있던 전통이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집회의 맨 앞에 꽹과리, 징, 장구, 북이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전통에 의한 것이지요.”

―그동안 지나온 길을 이번에 새삼 돌아봤을 텐데, 보람과 회한 어느 쪽이 더 크던가요.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회한이 큽니다. 철저히 무시당하고 천대받았으니까요. 조선 500년 양반문화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연세 드신 분들은 전통 연희를 낮춰봅니다. 6·25전쟁 이후 산업사회로 가는 단계에서 서양 것은 높이고 우리 것은 낮추는 사회 풍조가 됐지요. 우리 전통 문화예술을 미신화했어요. 동네잔치 하면서 돼지 한 마리 잡아서 국밥 나눠 먹는 두레 문화가 쇠퇴했지요. 상주굿, 지신밟기 같은 놀이들이 사라지면서 전통 예인들의 무대도 없어졌지요.”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한 선대 명인들, 나아가서는 전통 연희를 지켜온 조상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20대에 ‘사물놀이’를 탄생시켰다고 했다. “전통으로 내려오는 신명, 저는 이것을 우리의 맛과 멋이라고 하는데요, 이걸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표현하려면 리듬 악기인 꽹과리, 징, 장구, 북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마당의 연희를 무대로 가지고 왔지요.”

전통 마당놀이가 시각적 연희라면, 사물놀이는 그것을 청각적으로 음악화한 것이다. “무대 공연에 맞는 새 레퍼토리를 계속 개발했는데, 그것이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했으니, 보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63년 음악광대 나만의 길 걸어… 대통령도 CEO도 부럽지 않아”

이제껏 전통가락 씨 뿌렸다면
다음은 이론화해 정리하는 단계
우리 악기 세계 표준화 통해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해야

유년기부터 ‘리틀엔젤스’ 활동
스티비 원더·엘비스와도 공연
두 번의 평양무대 기억에 남아


―‘사물놀이’ 탄생은 우리 전통공연 역사에서 대단한 사건이었지요.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코흘리개 때부터 해외에 나가서 공연하며 우리 것이 통할 수 있다, 이건 이야기가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기획, 제작을 했어요. 사물놀이의 각자 역할에 맞게 멤버를 한 명 한 명 뽑아서 구성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연행(演行)과 기획·교육에 반반씩 투자됐다고 했다. 기획자로서의 노하우는 리틀엔젤스예술단의 박보희 이사장 등에게서 배웠다. “제가 1974년에 한국민속가무예술단 단장이 됩니다. 이건 여기서 처음 공개하는 것인데요, 그즈음에 세계 무대를 겨냥한 공연 기획사인 한국창예주식회사 대표도 맡게 돼요. 자랑할 이력은 아니지만, 그런 역할을 통해서 우리 것을 세계에 전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요.”

그는 이 대목에서 평생의 은인으로 자주 언급해왔던 건축가 김수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펼쳤다. “1969년에 연행가와 건축가로 만났는데요, 1970년 오사카 엑스포에서 한국관을 김수근 선생이 지었는데, 그걸 거북선 모양으로 하셨어요. 일본 땅에서 거북선이라니…. 그때 전통 연희판을 어떤 것으로 하면 좋겠냐고 하셔서 마당놀이 판으로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이후 그는 김수근이 사옥에 마련한 소극장 ‘공간 사랑’을 통해 문화예술계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그 선생님들께 자문하곤 했어요. 제가 무대 연출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하겠다고 하니까, 어른들께서 ‘야, 미친놈아, 무대연출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전통 연희는 네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 네가 가장 잘하는 것을 여기서 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어른들의 말씀을 따라 국내에 남아 연희 공연에 힘쓰고 전통 계승 방법을 고민하다가 터져 나온 게 사물놀이였다.

―초기 멤버에 대한 회한이 이번 공연에 담겼다고 하더군요.

“1978년 2월 22일 ‘공간 사랑’에서 첫 공연을 했는데, 죽은 용배(김용배 상쇠·1952∼1986)와 함께 했지요. 아시겠지만, 용배는 제가 중학교 때 만난 예술 파트너이지요. 그때 중학 선배인 최태현, 이종대가 함께했어요.”

흔히 사물놀이 초기 멤버로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 이광수를 꼽는다. 1978년 첫 공연에 이들 멤버 이름을 올려놓은 기록이 많다.

그러나 김 명인은 최종실과 이광수는 나중에 합류했다고 밝혔다. 그 멤버로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걸게 된 것은 첫 공연 후 1년 반이 넘어서였다는 것이다.

1978년 첫 공연 팀 이름은 ‘웃다리 풍물 앉은 반’이었다. 경기·충청 지방 풍물을 앉아서 연주하는 팀이라는 뜻이었다. 뒤에 민속학자 심우성이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사물(四物)은 절에서 예불 때 치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가리켰으나, 사물놀이가 널리 알려지면서 꽹과리, 장구, 북, 징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그즈음에 사물놀이가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게 기억납니다.

“인기 정도가 아니라 정말 가는 곳마다 난리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용배를 국립국악원에서 빼 갑니다. 친구가 국립 기관으로 가는 것이니 축하를 해 줘야 하지만, 저에겐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엄청난 상처였죠. 우리 사물놀이 앙상블이 확장세로 막 나갈 때 아닙니까. 뉴욕타임스에 기사가 날 정도로 주목받고 있었는데….”

시종 거쿨지게 말하던 그가 처음으로 뒤를 흐렸다. 1984년 김용배가 국립국악원 상쇠로 옮겼을 때 그가 느꼈던 아픔이 여실히 전해졌다.

호사가들은 그와 김용배가 사물놀이 실력에서 라이벌 관계였고, 음악적 견해가 달라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입방아를 찧기도 했다. 나중에 최종실, 이광수가 탈퇴할 때도 이런저런 뒷이야기가 있었다.

김 명인은 그런 구설 따위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고 다시 팀을 꾸려서 공연함으로써 우리 시대에 자임한 역할을 꾸준히 수행했다.

“한 인간이 인생에서 자기 역할을 깨달으며 얼마나 정진할 수 있을까. 그게 저희 화두였습니다.”

그가 33년 전에 사물놀이 사단법인체 한울림을 만든 것도 그 역할의 하나였다. 한울림은 해외 마케팅, 국제 네트워크 구축, 악기 보급 및 개량, 콘텐츠 개발 사업 등을 펼쳐왔다.

“그즈음부터 국내외 제자들을 받아들여 숙식을 함께하며 교육시켰는데요, 쌀 한 가마니가 금세 동났어요. 50, 60명에 달했거든요. 힘들었지만, 우리 것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웠어요.”

전통 연희 전승을 중시한 그는 관련 학교를 3개 만들었다. 그중 전남 영암 남도문화예술교육원은 문을 닫았으나, 사물놀이 부여교육원은 지금도 계속 운영하고 있다. 공방교육원도 악기 개량 작업을 여전히 진행하고 있다.

“우리 악기를 브랜드화, 스탠드화 하는 게 필요합니다. 모든 악기를 전 세계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표준화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국제 메인 스트림에 맞춰서 음악 교육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교육자로서의 정체성도 지니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20여 년간 전통 연희를 가르치며 후학을 배출했다.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서 우리 음악을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희망을 봤습니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는 거죠. 제 영향을 받아서 우리 쪽의 공부를 하겠다고 온 친구들이 한국뿐만 아니라 5대양 6대주에 있으니 선생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연희를 공부해서 먹고 사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을 제대로 지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신명의 근본은 더불어 나누는 홍익이고, 상생입니다. 이 신명을 이루는 가락의 구조가 우리말의 억양과 같습니다. 북방, 남방 문화가 혼합해서 나온 것이니까요.”

그는 이때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앞으로 뻗으며 리듬을 탔다. “쿵짝, 쿵∼. 하나 속에 셋, 하나 속에 둘, 하나 속에 넷, 하나 속에 다섯∼. 서양은 분박으로 하지만, 우리는 호흡의 신명으로 합니다. 하∼나! (손끝에서 어깨까지 사뿐사뿐 춤사위를 만들며) 두∼울 하∼나. 이게 보법으로 일치하면 둥글게 감기는 맛이 납니다. 감기는 맛! 이게 엄청난 물리학이에요.”

그가 왜 평생 예인의 길을 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가락의 흥감이 그의 몸에서 절로 뿜어져 나왔다.

“혼합박은 좀 길어요. 하나∼ 하나∼ 하낫 둘 셋 넷. 여기에 하늘과 땅과 사람, 천지인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러니 서양 음악 전공자들이 악∼ 하는 거예요. 홀 사운드여서 어디 뚫고 나갈 데가 없다는 거예요.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불러다가 비싼 돈 주고 특급호텔서 재워주며 공연을 보겠다고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우리 국민이 우리 거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해외 공연만 5000여 회를 하고, 국내 공연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하나가 다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도 꼽으라면, 역시 1978년 2월 22일의 사물놀이 탄생 공연이지요. 두 번의 평양 공연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다음엔 1982년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서 있었던 세계타악기컨벤션에서 공연한 것을 꼽겠습니다. 한 방에 끝냈지요.”

세계시장 진출 교두보를 마련한 댈러스 공연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우리 전통의 소리로 미국 관중 4000여 명의 혼을 뺏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스티비 원더 등 세계적인 스타들과도 공연했지요.

“그걸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아기 때부터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해외 공연을 다니며 엘비스 프레슬리, 톰 존스 등 세계 스타들과 함께 무대에 섰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 예인만이 갖고 있는 권한과 자부를 배웠지요. 서양에선 아티스트가 되는 게 최고의 꿈이더군요. 우리와 가치관이 달랐어요. 그래서 저 역시 대통령도 재벌도 부러워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간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지요.(웃음)”

―대중음악그룹인 ‘서태지와 아이들’과도 함께 작업하는 등 퓨전 작업을 적극적으로 했는데, 우리 전통음악의 정수를 해친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사물놀이 자체가 이단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어조가 높아져서) 나는 항상 그렇게 말했어요. 이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가 있으면 나와 토론하자. 조상들이 살던 때와 지금이 같으냐. 본질을 지키면서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는 게 전통이다. 본질은 우리 신명, 즉 맛과 멋이다. 통일신라 때 최치원 선생이 우리 풍류도에 대해 유불선 통합이라며 이미 융합을 말하지 않았느냐. 융합을 하더라도 우리 것의 본질 100%를 갖고 오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재즈, 블루스와 퓨전을 할 때 코리언재즈, 코리언블루스라고 하는 것은 다 그 때문입니다.”

그는 여기서 또다시 전통 음악의 대중화, 세계화에 대한 자신의 소임을 말했다. 그는 굿거리 기본 장단에 원방각(하나의 원이 4개의 방으로 나뉘고, 하나의 방이 다시 9개의 각으로 나뉘는) 이론을 적용해 서양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교칙본, ‘장구 바이엘’을 만든 바 있다.

“이제껏 씨를 뿌렸으니 그다음 단계의 이론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평생 해 왔던 것을 정리하는 것이지요. 음악학, 사회학자들 도움을 받아 전통타악대강이라고 할까요, 제 남은 생애에 그걸 정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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