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숯의 화가’ 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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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논설고문

“서양 미술이 색(色)의 세계라면, 동양 미술은 먹의 세계다. 그 먹의 재료가 숯이다. 숯은 하나의 사물에 그치지 않는 동양의 문화다. 한국에선 간장·된장을 담그며 독 안에 숯을 넣고, 아이가 태어나면 숯과 빨간 고추를 끼운 새끼줄을 대문에 내거는 관습도 있었다. 상징적으로는 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의 마지막 모습이지만,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완전히 태웠어도 죽은 게 아니고, 불을 다시 붙이면 붙는, 에너지가 충만한 존재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생명의 원천을 의미한다.” 주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미국 뉴욕과 서울, 고향인 경북 청도 등지에도 작업실을 둔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이배(64)의 말이다.

본명이 이영배인 그는 직접 소나무를 태워 만든 숯가루로 그린 기호학적인 추상화와 사실화(寫實畵), 숯을 잘라 캔버스에 붙인 입체화, 숯덩이를 여러 개 묶어 바닥에 놓거나 공중에 매단 조형물 설치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 활동을 하지만, 흔히 ‘숯의 화가’로 불린다. 그가 숯을 주목한 것은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중학교 미술 교사로 지내다가 1989년 파리로 유학을 간 이듬해였다고 한다. 문화적 토양이 다른 유럽 미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왔는가 등을 자문하던 그는 무심코 지나가던 집 앞의 가게에서 바비큐용 숯을 발견하고 대학 시절의 목탄 데생 기억이 떠올라서 샀다. 한 포대에 2000원 남짓이던 숯은 가난한 유학생에겐 수십 배 더 비싼 유화 물감을 구하지 않아도 되게 했다.

그렇게 시작해 숯을 통한 독창적 미술 세계를 구축한 그는 2015년 유럽 최대 동양 미술관인 파리의 프랑스 국립 기메동양박물관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가진 개인전을 비롯해 이탈리아·미국 등지의 세계적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크게 명성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Issu du feu’ ‘Landscape’ ‘Drawing’ ‘Acrylic medium’ 등 그의 대표적 연작 30점을 선보인 전시회가 서울 평창동 갤러리2에서 지난달 16일 개막해 오는 23일 끝나고, 이어서 부산 조현화랑에서 30일까지, 제주 중선농원에서 7월 11일까지 열린다. “숯은 검은색이지만 모든 색을 포용하며 빛도 머금고 있어 내 그림을 빛으로 그렸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많다”는 그의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이고, 전통적이면서 첨단적인 작품 앞에 서면 감동의 전율을 경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