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거짓’으로 미·북 중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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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승배 정치부 차장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 5월 1일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으로 구성된 통신사 일행은 부산에서 출발해 일본 교토(京都)에 도착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고 이듬해 1월 28일 부산에 도착했다. 통신사 일행은 1591년 3월 1일 선조 임금에게 복명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황윤길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必有兵禍)’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린 반면, 부사인 김성일은 ‘도요토미는 쥐같이 생겨서 두려워할 인물이 못된다’는 내용을 담은 정반대되는 보고를 올렸다. 조정은 김성일의 보고를 받아들였다. 물론 조정 전체가 책임질 일을 김성일의 귀국보고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400년도 넘은 ‘조선의 오판’을 갑자기 꺼낸 이유는 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회고록에는 ‘미국의 북핵 오판’의 단초가 된 것으로 보이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우리 정부의 ‘배달 사고’를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미국이 북한 비핵화에 대해 결정적 오판을 하게 한 것은 2018년 3월 6일 대북특사 자격으로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온 정 실장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북 결과를 설명하면서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김정은의 ‘조선반도 비핵화’가 ‘북한의 핵 포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김정은이 ‘핵 포기’를 약속한 것처럼 발표했던 것이다. 볼턴은 “트럼프와의 회담도 김정은이 아닌 정의용이 제안했고, 나중에 정 실장은 (트럼프를 만나) 그런 초대를 김정은에게 제안한 사람이 자신이었다고 시인했다”고 적었다. 정 실장과 한국 정부의 이 같은 잘못된 보고는 지난해 2월 ‘하노이 노딜’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다음 날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김 위원장에게 1년 안에 비핵화할 것을 요청했고, 김 위원장이 동의했다”고 말하며 가세했다.

특히 볼턴의 회고록 중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북 간 전체 외교가 “한국의 창조물”이며, “김정은이나 우리 쪽에 관한 진지한 전략보다는 한국의 통일 어젠다에 더 많이 관련된 것”이라고 평가한 부분이 나온다. 볼턴이 ‘한국의 창조물’이란 말을 썼지만, 그가 정말 쓰고 싶었던 직설적 표현은 아마도 ‘한국의 계략’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볼턴의 발언이 공개되면서 하노이 노딜 당일 북한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의 기자회견 내용이 다시 소환된다. 최선희는 당시 “미국의 셈법을 이해 못 하겠고, 앞으로도 이것보다 더 좋은 안이 나올 거라 기대하지 말라”고 했었다. 주미대사를 지낸 안호영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최근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이 발언에 대해 “북한 외무성이 미국 전문가로 키운 게 최선희와 리용호 외무상인데, 미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미국을 모르나 생각했다”고 했었다. 미국 의회나 정부의 북핵에 대한 시각에서 보면 영변 핵 같은 부분적인 것을 내놓고 받아가겠다는 식의 이른바 ‘스몰딜’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런 기대를 갖고 68시간 걸려 김 위원장을 하노이까지 오게 했을까 하는 얘기다. 볼턴 회고록을 보니 최선희가 미국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미국과 북한에 각각 잘못된 정보를 주고 기대를 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른바 ‘한반도 중재론’의 민낯이 다 드러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