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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20년 07월 07일(火)
백성 버리고 자기 안위만… 무능한 군주, 끝까지 졸렬한 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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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선조는 재위 40년간 임진왜란, 가뭄과 홍수 등 역사의 모진 풍파에 쫓기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도피와 기득권 유지 등으로 점철된 그의 삶은 후대에 국왕의 리더십에 대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 사진은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군(여진구)이 피란 가는 선조 일행에 엎드려 절하는 장면이다.

■ 박현모의 한국형 소통이야기 - (11) 선조 말 혼미한 국내외 정치

임진왜란 터지자 수도 팽개치고 도망 다닌 선조… 어린 적자에게 왕위 물려주려 세자 교체 시도하다 사망

對日 국교 정상화 조건, 도쿠가와 이에야스 國書·왕릉 파헤친 범인 송환 안됐는데… ‘승리한 군주’명분 쌓으려 어정쩡하게 봉합


1607년, 선조 재위 40년의 실록은 우울한 일로 가득하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째에 접어들었지만, 민생은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뭄과 홍수, 그리고 들판을 휩쓴 황충(蝗蟲)으로 백성들은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무뢰배가 사람을 죽여 쓸개를 빼내 중국에 판다”는 소문이 나돌아 백성들이 집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들어 가기도 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일본의 재침략설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의 급속한 세력 팽창도 사람들을 위축시켰다. 종전(終戰)이라지만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국왕 선조의 말처럼 “금일의 인심(人心)과 국세(國勢)는 한 가지도 믿을 게 없어 임진년 난리가 한창일 때보다 못한” 상황이었다(선조실록 40년 6월 1일).

‘선조실록’을 읽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도대체 조선의 신민들은 그런 임금을 어떻게 40년간이나 섬길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도망간 임금, “나는 어진 이를 배척하고 간사한 사람을 쓰고, 실성하여 나라를 잃은 전하(斥賢用邪失喪國殿下)”라며 자포자기한 국왕을 어째서 갈아치우지 않았을까? 조선이라는 왕정체제나 유교 이념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사람이 왜 나오지 않았을까?

문득 폴란드 출신 철학자 콜라코프스키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1989년 훨씬 이전에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경제적 비효율과 전시의 재앙과 같은 객관적 기준의 쇠퇴만으로는 민중들의 봉기가 유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비판의 영역 밖에 있었으며, 공산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반증할 만한 사실들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늘 체제 옹호론자들에 의해 거짓 뉴스로 간주되거나 추방됐다는 게 그의 통찰이다(L. Kolakowski, ‘마음과 몸: 공산주의 붕괴에서 이데올로기와 경제’, 1992).

조선왕조의 정치이념인 유교 역시 비슷했다. 체제의 문제점은 지도자 개개인의 학습 부족으로, 수기(修己)에 실패한 일부 관리의 일탈로 간주됐다. 사회 및 정치체제의 모든 반증을 흡수해 버릴 만큼 강력한 유교 성리학은 7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왕의 책임을 묻거나, 양반의 세습된 특권이나 노비제도와 같은 체제의 허점을 따질 기회를 봉쇄해 버렸다.

그 점에서 1607년 10월 9일은 조선의 신민들에게 기회였다. 국왕 선조의 건강 이상으로 조선왕조 정치변동의 3대 원인인 왕위 교체의 가능성이 생겼다. 실록을 보면 이날 세자(광해군)가 ‘임금 위급’이라는 전갈을 받고 왕의 거처로 달려가 보니 선조는 대신과 어의들 사이에 기절한 채로 누워 있었다. 어의 허준의 치료를 받고 잠시 깨어난 선조는 저녁 무렵에 다시 호흡 곤란 증세를 보였다. 이틀 뒤 선조는 자신의 건강을 이유로 “세자에게 전위(傳位·자리를 물려줌)해야겠다”고 말했다. 신하들의 반대를 의식한 그는 전위가 안 되면 섭정(攝政·임금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라도 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선조는 전위 의사를 밝힌 후에도 구체적인 조치(세자에게 옥새를 건네주거나 익선관을 씌워주는 것 등)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뜻밖의 지시가 중전에게서 나왔다. 왕비(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가 삼정승을 모이게 한 다음 언서(諺書·한글문서)로 “왕명을 순순히 따르라”고 촉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영의정 유영경 등은 “오늘의 전교는 뭇사람의 생각 밖에서 나온 것이니,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고 반대했다. 추측하건대 선조는 과거의 태종처럼, 전위 의사를 밝힌 다음에 세자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태도를 떠보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왕비의 생각에는,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이 겨우 두 살인 상황에서 전위는 너무 이르다고 판단한 듯하다. 왕과 왕비의 소통 부족이 세자의 정치수명을 연장시킨 것이다.

▲  선조 어필 병풍.

1607년은 대외적으로도 변화가 감지되는 해였다. 그해 1월에 여우길 등 467명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이름으로 일본에 갔다.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怨讐)지만,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데려오고 전쟁 재발을 막으려면 그들과 국교를 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 자각의 결과였다. 양국 최고 권력자의 정치적 동기, 즉 전쟁에서 승리한 군주라는 명분을 쌓으려는 선조와 조속한 전후 처리 매듭 및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필요로 양국의 국교는 예상보다 빨리 정상화됐다. 조선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던 대마도주의 적극적인 노력도 국교 재개에 속도를 내게 했다.

그런데 선조는 이즈음 자신이 내걸었던 국교 정상화의 두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음에도 무척 서두르고 있었다. 두 조건이란 일본 실권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국서를 보내는 것과 임진왜란 때 왕릉을 파헤친 범인 2인을 송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년 전인 1606년에 대마도에서 보내온 2인이 왕릉을 파헤친 일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조사과정에서 밝혀졌음에도 선조와 유영경은 이를 그냥 덮어뒀다. 국교 정상화를 기정사실화하고, 국격(國格)이나 국익에 관한 세부적인 논의를 생략해 버린 것이다.

이덕형이 주장한 것처럼, 그 당시 대마도는 국교 재개 자체가 생존을 위한 시급한 과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1605년에 아들 히데타다에게 양위한 상태여서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서두르고 싶어 했다. 따라서 조선 정부에서 좀 더 시간을 끌며 조건을 따졌더라면, 이후 협상에서 훨씬 유리한 양보를 얻어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조와 유영경이 미숙하게 서두르면서 이후 양국 간의 관계는 어정쩡하게 맺어졌고, 그것은 이후 200여 년이나 지속됐다.

실록을 보면, 1607년 10월의 전위 파동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났다. 하지만 세자(광해군)를 왕위 후계자에서 밀어내려는 선조의 시도는 계속됐다. 그는 적자인 영창대군의 총명함을 공개석상에서 자랑하는가 하면(대안1), 왕자 이종(나중의 인조)을 불러 “너는 나를 기쁘게 하는 아들”이라고 대놓고 칭찬하기도 했다(대안2). 병문안을 온 세자에게 선조는 “너는 왜 매번 내 말을 어기는가”라며 꾸짖었다. “지금의 세자는 명나라에서 책봉을 받지 못했다”면서 자격을 문제 삼기도 했다. 이처럼 세자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에서 정인홍의 ‘죽음을 무릅쓴’ 상소가 올라왔다.

선조의 총애를 받아 지금의 검찰총장 격인 대사헌을 두 번이나 지냈던 정인홍은 상소에서 먼저 전쟁 중에 세자가 왕을 도와 분조(分朝·분할된 조정)를 이끌었던 사실을 지적했다. 선조의 병환 중에 극진히 간호했던 세자의 효심도 상기시켰다. 이어서 그는 “왕의 전위 전교는 뭇사람의 생각 밖에서 나온 것이라 받들 수 없다”고 왕명을 거역한 유영경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세자를 동요시키며 종사를 위태롭게 하는 유영경을 묵묵히 따르고 있는 조정 대신과 언관, 승지, 사관까지도 모두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  선조 목릉 정자각.
“정인홍의 상소는 극히 흉악하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무시하고 넘어가려는 선조에게 유영경은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자신이 받은 모함은 그 화가 개인 신상에 미칠뿐더러 종묘사직에도 관계되는 것이니 실상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선조는 “정인홍의 상소에는 흉모(兇謀)가 들어 있다”면서 그를 지지하는 자들을 모두 “반역의 무리”라고 규정지었다. 그러자 정인홍에게 비판받았던 조정 대신과 언관들이 일제히 정인홍의 ‘배후’를 거론하며 나섰다. 이 사건이 장차 큰 정치파동으로 번지려 하는 즈음에 갑자기 왕이 사망했다. 생각해 보면 정인홍이 참으로 절묘한 시점에 상소를 올렸고, 그 상소로 말미암아 세자가 살아났다. 그렇게 살아난 세자는 정인홍과 그의 지지 세력(대북)에 권력을 쥐여줬다.

선조 말년의 실록을 읽으면서 깨달은 건 세 가지다. 첫째, 혼군은 끝까지 혼군의 길을 간다. 마지막 순간에 어린 적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며 명분과 실리 어느 것도 없는 세자교체를 시도하려 했던 선조를 명군으로 바꿔보겠다고 애쓴 많은 사람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을 한 셈인가. 둘째,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는 지배계층은 없다. 선조 말년의 왕과 정승들의 행태에서 보듯이, 기득 세력은 연합하거나(음서 등 귀족 특권 옹호), 잘라내거나(반대파 숙청), 배제하는(특정 신분의 임용 및 승진 제한)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익을 지키려 했다. 그들에게 유교 이념은 종종 기득권 유지의 정당화 수단으로 이용되곤 했다. 셋째, 집권자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졸속으로 맺어진 외교(국교 정상화)는 결국 국익을 해친다. 유영경이 만약 국교 재개를 반대하는 조선 내 목소리를 활용해서 상대방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얻어냈더라면, 그 이후 조일관계(특히 대마도의 귀속문제)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 용어설명

조선왕조 정치변동의 3대 원인


조선왕조 정치체제는 지속성과 변화를 거듭하면서 518년을 지탱했다. 이 중에서 국왕이 바뀌어도 계속해서 이어진 것은 ① 공론정치로 표현되는 지배층을 제약하는 논리와 명분, 그리고 ② 관료제 내 외부의 견제장치 등이었다. 이에 비해 국왕이 바뀌면 달라지는 것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① 민생으로 표현되는 백성들의 삶의 질 ② 사대교린 외교에 따른 국격의 높낮이, 그리고 ③ 국왕의 리더십이다. 후자, 즉 변화를 가져오는 세 가지 요소로는 ① 중대한 자연재해 ② 전쟁 ③ 국왕의 교체를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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