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문 정권 反日과 ‘정신 승리’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신우 논설고문

대법원 징용공 배상 판결 이후
日정부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한국도 일본 제품에 불매 운동

선택적 불매는 상징 집착 불과
한일교역 구조 진실 호도할 뿐
현실 인식 차원서 문제 해결을

1980년대 전두환 정부는 사회에 만연한 부패 현상으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언론에 자주 보도된 것이 정부가 주도하는 ‘부패추방결의대회’였다. 패턴은 늘 비슷했다. 정부부처 합동 방침이 발표되고 뒤이어 선남선녀 두 명이 나와 마이크 앞에서 부패 추방 결의문을 선창한다. 이렇듯 우리는 어떤 결의대회를 열면 마치 희망 사항이 이뤄질 수 있다는 식의 접근 방식을 보이곤 했다. 내용의 실질적 변화보다 상징이나 형식에 대한 집착인 셈이다. 그럼 그 많은 결의대회로 한국사회에서 부패는 줄어들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대한민국에서 부패가 줄기 시작한 것은 추방결의대회가 아니라 시민의식의 고양과 법적 처벌 강화가 맞물리면서였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에 대한 일본기업 배상 판결 이후 일본 정부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반도체 첨단 소재의 수출 규제로 맞섰다. 그러자 한국민과 정부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소재·부품·장비 자립 캠페인을 벌이는 식으로 맞대응해 왔다. 이런 과정에서 변함없이 나타난 것이 한국 정부와 국민의 여전한 상징 집착이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전형적인 예다. 마치 의류 메이커인 유니클로와 일본 맥주만 망쳐놓으면 한·일 갈등에서 일본에 보복할 수 있고, 무역 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식이다. 심지어 ‘No Japan,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시내 곳곳에 나붙기까지 했다.

그럼 이런 불매운동은 성공했을까. 물론 유니클로와 일본 맥주에 관해서는 성공했다. 일본 맥주는 한국 시장에서 전멸했고 유니클로는 최근 9개 매장의 폐점을 발표했다. 마치 결의에 찬 우리 행동에 일본이 무릎이라도 꿇은 듯했다. 하지만 똑같은 시기에 한국인들은 일본 닌텐도에서 내놓은 게임 ‘동물의 숲’을 사기 위해 마트나 전자제품 판매업체 앞에서 아침부터 줄을 서는 해프닝을 벌였다. 한국인의 일본 불매 운동에는 언론인들도 적극 앞장섰지만, 이들이 즐겨 쓰는 카메라나 방송 장비는 거의 대부분이 소니 등 일본 제품이다. 닌텐도 게임이나 방송 장비야 대체품이 없다고 하지만 그럼 지난 5월 중 일제 담배 수입량이 전년 동기 대비 20% 늘어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의료용 기기는 말하기도 쑥스러울 지경이다. 한국의 병원마다 구비하고 있는 위·대장 내시경 대부분이 일본 올림푸스 제품이다. 물론 대체 상품을 찾을 수는 있다. 호야나 후지 제품은 어떨까. 불행히 이 두 내시경 제품도 일제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2018년에 밝힌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산품에서 일본산 부품·소재의 수입의존도는 섬유·화학·차량·선박·플라스틱과 고무·기계 및 전자기기 각 분야에서 90%를 넘는다. 2년이 지났다고 해서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일제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는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 1년을 맞아 “특정 국가(일본)에 의존적이던 공급망을 새롭게 구축했다”며 “무엇보다 ‘해보니 되더라’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크다”며 한껏 가슴을 폈다. 대통령이 이처럼 진실을 잘못 전하는 와중에 제조업의 근간인 주물·금형·소성가공·도금·열처리 등에서 약 55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국내 3만3000여 개 뿌리 기업들이 지금 줄폐업의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달 평균 가동률은 1년 전에 비해 반 토막이 났다. “일본 업체들이 수십 년간 이어온 거래를 최근 갑자기 끊었다”는 한 뿌리 기업 대표는 “양국 간 무역분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한국경제신문 7월 15일 자)고 전했다.

대법원 판결에 따른 일본 ‘전범기업’의 자산 매각이 지난 4일부터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일본 정부 쪽은 자산 매각 조치에 대한 보복과 자국 기업 자산 지키기를 천명해놓은 상태다. 한국 정부 역시 일본 정부가 보복을 실행할 경우 이에 대처할 플랜B까지 세워놨다고 한다. 우리 정부 일각에서는 대법원 판결을 이행해도 실제적으로 일본 기업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한국기업이나 민간이 기금식으로 보상을 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모양이다. 일본은 당연히 거절하고 있다. 설령 기금 방식의 보상이 통한들 이는 아무런 실익도 없는 명분 얻기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현 정권 집권 뒤 한국 정부에는 상징 집착과 정신 승리, 그리고 이를 통한 반일(反日)감정 부추기기밖에 남지 않는다. 양국 간 선린외교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