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③ 종교,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다

  • 문화일보
  • 입력 2020-10-1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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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 = 이정호 작가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고정되고 규정된 틀 속 제도화된 교회엔
코로나가 부른 비대면 예배는 ‘강요된’ 종교개혁
공동체는 집단 아닌 ‘고유한 한 명’들의 모임
전체의 일부로 흡수될 때 사람은 존재를 멈춘다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

1. 하란에서 아브람을 찾아온 신은 지금 살고 있는 땅을 떠나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했다. 신은 특정 장소를 지칭하지 않고 ‘내가 보여줄’ 땅이라고 했다. ‘보여줄’ 땅은 보여줄 때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살고 있는 땅은 보이지만 가라고 한 땅은 보이지 않는다. ‘보여줄’ 땅에는 지금 살고 있는 땅이 확보하고 있는 물리적 확실성이 없다. 어디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은’ 땅은 장소라고 할 수 없다. 고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 ‘보여줄’ ‘보이지 않은’의 특징이다.

아브람이 고정된 확실성의 세계로부터 그렇지 않은 세계로 초대받고 있다면 여기에 초대자인 신의 뜻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사람의 본성을 거슬러 불확실의 세계, 보이는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땅’이 아니라 ‘보여줄’에 집중해야 한다. 땅은 지금 없다. 땅은 ‘보여줄’ 때 비로소 있게 될 것이다. ‘어디’와 ‘언제’가 고정돼 있지 않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보여줄’ 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미래형을 쓴다. 신은 불가시성, 비고정성, 규정불가의 세계에 대해 말한다. 그가 가야 할 곳이 보이지 않고 고정돼 있지 않고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아브람은 신(의 말)을 따라 살 수밖에 없다. 신이 원하는 것은 고정된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보여줄’ 신과의 관계 유지다. 아브람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인지 정해지지 않은 곳으로 간다.


2. 야곱은 형으로부터 도망가는 도중 벌판에서 돌을 베고 잠든다. 꿈속에서 그는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보고 신의 음성을 듣는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두려운 가운데 고백한다.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는데 알지 못했구나.”

그 체험을 통해 그가 알게 된 것은 신이 그 벌판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의 있음’은 그의 앎(혹은 모름)과 상관없다. ‘이곳에 계시는데 알지 못했다’는 그의 말은 그가 알지 못할 때도 그분이 거기 계셨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됐다는 고백이다. 그가 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모를 때도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고백이다. ‘신이 거기 있었다’는 문장을 신이 거기에만 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거기에 이르러 거기에만 있는 신을 찾아냈다는 뜻일 리 없다. 신을 만나기 위해 가야 할 ‘거기’가 따로 있다는 뜻일 리 없다.

다른 모든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한 장소를 점유하고 존재하는 이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존재의 근거, 존재의 깊이, 존재 자체(폴 틸리히)인 신이 유한한 존재자와 존재 방식이 같을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을 체험한 곳, 신을 만난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다. 야곱은 ‘거기’에서 신을 만났다. 이 문장은 바르게 이해돼야 한다. 거기가 신의 거주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신이 그를 만나주었기 때문이다. 신은 특정한 장소에 고정되지 않는다. 야곱이 경험한 것은 어디에 있는 신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신이다.


3. 불가시성, 비고정성, 규정불가의 세계가 신성의 영역이다. 신은 거룩하지만 거룩하다는 규정을 거부한다. 신은 전능하지만 전능하다는 정의에 갇히지 않는다. 영원, 초월, 무소부재, 사랑, 정의와 같은 속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런 속성으로 규정되는 것은 같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규정되지 않고 정의되지 않는 것을 못 견뎌 한다. 그런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은 완전해져야 하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제도화된 종교와 그런 종교에 익숙해진 종교인은 신을 고정적 존재로, 파악 가능한 쉬운 존재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신은 가시적이고 고정돼 있고 익숙하고, 무엇인가의 대체물이 된다. 신은 정착해 있으므로 두렵지 않고 파악됐으므로 신비가 아니다. 익숙해졌으므로 긴장할 필요도, 떨 이유도 없다. ‘보여줄’ 땅을 바라지 않으므로 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가시적이고 고정되고 규정된 틀을 가진 제도화된 종교 아래서 예배는 형식과 기능, 즉 행사가 된다. 견고한 교리와 세련된 형식을 갖춘 종교는 종교인을 예배라는 이름의 잘 기획된 행사에 참여하는, 동원되는 일원으로 만든다. 이런 종교는 현저한 그 장소적 성격으로 인해 아브람이 떠난 하란, 야곱이 떠나기 전의 어머니의 장막과 동일해진다.


4. 예배 행사의 참여자는 자신의 전적인 동의나 신과의 인격적인 교통 없이, 그저 틀에 박힌 익숙한 의식에 몸을(몸만) 내주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 행사장을 떠난다. 카페에 마주 앉아 있지만 각자 다른 사이트에 접속해 있는 연인과 예배당에 앉아 있는 신자의 상태는 유사하다. 카페에 마주 앉은 연인은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간혹 얼굴에 웃음이 번지지만 그 웃음은 마주 앉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향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곳에 접속해 있다. 신체적으로 옆에 있는 연인의 마음이 실제로 어디에, 혹은 누구 옆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물리적 접촉이 만남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물리적으로 예배당에 앉아 있는 사람 역시 실제로 누구와 만나고 있는지 말할 수 없다. 제도화된, 굳은, 안전한 종교 안에서 많은 경우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이를테면 권력이나 출세나 부의 축적 같은)의 대체재, 혹은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지렛대가 된다. 신은 이용당한다.


5. 자신이 속한 종교집단의 일원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 상태의 어떤 종교인은 분별과 판단의 능력을 압수당한다. 전체의 일부로 흡수될 때 사람은 개별적 존재이기를 멈춘다. 이는 신이 사람을 만나는 방식에 위배된다. 아브람과 야곱에게 그런 것처럼 신은 대체불가의 유일한 ‘한 명’인 개인에게 다가와 말한다. 사람이 신 앞에 하나의 인격적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의 인격적 존재일 때 신이 사람에게 말을 건다. 말을 걺으로써 사람을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만든다고 할 수도 있다.

신의 일부가 돼 있는 나는 신에게 갈 수 없다. 나의 일부가 돼 있는 신은 나를 찾아올 수 없다. 흡수와 예속은 인간을 대하는 신의 방법이 아니고 신을 대하는 인간의 방법도 아니다. 인간이 신에게 흡수돼 버릴 때 인간의 행동은 신의 행동이 된다. 인간의 어떤 과오도 인간의 책임이 아닌 것이 된다. 그럴 때 인간은 신을 이용하거나 신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혹은 모든 책임을 신에게 떠넘기는 자신에게 이용당한다.

공동체는 집단이 아니라 고유한 ‘한 명’들의 모임이다. 몰입과 흡수, 예속이 신앙심의 지표가 되는 순간 인간은 고유성을 잃고 사유할 줄 모르는 기계, 프로그래밍 된 내용에 따라 열광할 뿐인 기계가 된다. 기계의 부품이 된다. 제도화된, 굳은, 안전한 종교가 신 앞의 유일한 존재인 사람의 지위를 빼앗는 일이 무의식, 무의지 중에 발생한다. 집단은 ‘개별성을 삼키는 육체의 집합체’다(알랭 핑켈크로트). 맹신은 믿음의 최상급이 아니라 믿음의 반대말이다.


6. 모든 개혁은 근본적으로 강요된다. 코로나19 상황은 사람의 모든 삶에 대한 개혁을 요구한다. 이제까지와 다른 삶을 주문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합금지· 비대면 예배는, 어떤 점에서 강요된 종교개혁이다. 개혁은 흔히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의 발명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의 회복을 통해 완수된다. 익숙해진 것은 낯설어져야 한다. 사람은 대체할 수 없는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서 규정되지 않는, 될 수 없는 신비인 신과 마주해야 한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의 대체재가 돼 있는 신을 구해야 하고, 전체의 부분으로 예속, 흡수시키는 맹신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야 한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교수

코로나19가 강제하는 종교적 상황은 종교제도의 충실한 일원이 돼 있는 우리를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세운다. 이 질문은 1세기의 예루살렘 종교인들을 향해 예수가 던진 질문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제도화된 종교적 관행에 대해 예수는 신랄했다. 예수는 제물을 파는 사람들과 성전세를 내기 위해 환전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고 쫓아냈다. 그리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을 나무랄 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할 때 그의 한결같은 말은 ‘종교인이 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진리를 제도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전체의 일부가 되거나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교수


이승우 :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1년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생의 이면’ ‘미궁에 대한 추측’ 등이 유럽과 미국에 번역, 소개돼 주목을 받았다. 2009년 장편 ‘식물들의 사생활’이 한국 소설 최초로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폴리오 시리즈 목록에 올랐다.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수상.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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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종교와 영성’, 그 성찰과 사유를 위한 액션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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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선 ‘종교와 영성’. 팬데믹 시대가 끝나고, 그 이후의 ‘세계’가 몇 번 지나간다 해도, ‘정답’을 구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종교의 의미와 역할을 다시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을 뿐. 사유의 여정에 가이드가 되어 줄 영화와 책을 살펴본다.

이안 감독의 2012년 개봉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맨부커상을 수상한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한 수작이다. 오로지 ‘이성’만을 믿는 무신론자 아버지와 달리, 세 개의 종교를 받아들인 주인공 소년 ‘파이’가 호랑이와 함께 바다를 표류하면서 겪는 모험담이자 성장기이다. 개봉 당시 종교 영화인가 아닌가 라는 분석과 의견이 분분했던 작품인데, 사실 영화는 종교뿐 아니라 철학과 문학을 아우르며 신의 존재, 자연의 섭리, 실재와 환상 등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무엇보다 섣부른 찬양도 비난도 없이, 성숙한 시선으로 종교와 영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

책 ‘신과 인간에 대하여’(동녘)는 2017년 작고한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 바르샤바 대학의 종교학 교수인 스타니슬라우 오비렉의 대담집. 낙관적 무신론자인 바우만과 회의적 유신론자인 오비렉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해 논한다. 책은 근본주의 신앙의 문제점과 그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고, ‘타인과 공존하기 위한 종교’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천한 소설 ‘세상의 주인(Lord of the World, 메이븐)’. 종교 서적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책은 1907년 로버트 휴 벤슨이 쓴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이다. 저자의 종교적 정체성이 강하게 반영되며 ‘신성(神性)’에 대한 위대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부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계하는 주제의식을 보이고 있다. 당시는 경제성장, 기술발전, 산업혁명, 무신론 등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고, 인간이 이룩한 놀라운 ‘업적’을 찬양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코로나가 맹목적인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에 대한 ‘경고’라고 할 때, 113년 전 쓰인 이 ‘미래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국내에는 올해 처음 번역돼 출간됐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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