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④ 사랑과 연애 - 코로나 시대의 ‘더 여전한 사랑’

  • 문화일보
  • 입력 2020-10-2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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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 = 백두리 작가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자신과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나르시시즘 시대에도
사랑은 타자의 존재를 잊지 않겠다는 것,
일상을 지키면서 그로부터 힘을 얻겠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진,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쓴 연인들이 키스를 하는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말문을 열 수도 있다.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코로나 시대의 사랑’으로 바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콜롬비아에서 시작된 익명의 편지 쓰기 프로젝트(마침 명칭이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다)를 언급해도 좋겠다. 온라인 데이트 시장이 급성장했다는 소식, 또 집에 너무 오래 같이 있게 된 부부가 서로를 견디지 못하고 ‘코로나 이혼’을 한다는 소식 등은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경우라 누구에게나 흥미로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눈 밝은 분들이 이미 다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특정 사건을 기점으로 세계가 달라졌다고,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해야 할 때가 분명 있지만, 그럴 때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이제 세계라는 것의 의미가 달라졌다거나 언어는 무력한 것이 됐다는 발언들이 나온 것은 그럴 만한 일인데, 어느 일문학자는 그런 진단 속에 담긴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이렇게 말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 사건 이전에도)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그런 것들은 쓰나미만큼 자신의 ‘세계’에 별다른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충격을 받을 필요도 있다고 말이다(심정명, ‘재난과의 거리’).

달라진 것(차이)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저널리즘만이 아니라 지식인을 자처하는 많은 이들의 숙명이다. 그들은 언제나 발견의 능력을 입증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발견돼야 할 차이가 발생했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가 달라질 때에도 여전한 것들이 있다. 큰일이 일어나도 어떤 여전한 것들은 더 여전해진다. 불행도 새로운 것이 더 값비싸다. 이미 충분히 나빴던 것들이 더 나빠지는 변화는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오늘 내게 주어진 ‘사랑과 연애’라는 주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코로나 이후 사랑과 연애는 달라졌는가 여전한가. 아니면 더 여전해지는 방식으로만 달라졌는가.


20년,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

예컨대 인터넷 말인데, 20년 동안 그것은 우리를 바꿨고, 또 바꾸지 못했다.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인터넷으로 신체의 한계를 초월한 원거리 대면이 가능하게 됐을 때 놀랐고 이를 ‘원격현전’(telepresence)이라 명명했다(‘인터넷의 철학’). 그러나 그는 이 변화가 우리를 궁극적으로는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데 내기를 걸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겐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추방할 수 없는 기본적 욕구”가 있는데, 세계를 최적의 상태로 움켜쥐려는 욕구가 그것이다. (파악(把握)이나 장악(掌握)이라는 말 속에 ‘움켜쥘 악’이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원격현전’은 ‘최적의 움켜쥠’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화기나 야구공을 몇 번씩 바꿔 쥐듯이, 또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에 서듯이, 우리는 신체를 통해 이 세계와 최선의 방식으로 만나기를 원하며,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래서 드레이퍼스는 두 최고경영자가 회사 합병을 결정할 정도로 서로를 신뢰하게 되려면 여러 번의 원격회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결국 그들의 거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최종적으로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최적의 거리에서 눈을 맞추고 가벼운 악수와 포옹을 해야만 생겨나는 확신, 이것을 ‘접촉신뢰’라고 부르면 어떨까. 원격현전은 접촉신뢰를 대체하지 못한다. 강의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다. 20년 동안 우리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연애를 할 때야 그렇다는 말이지, 연애 자체를 거부한다면? 20년 동안의 진로가 오히려 이 거부의 방향 쪽이라면?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에로스의 종말’과 함께 오늘날 ‘사랑의 위기’를 말하는 많은 사상가들의 명단에 합류한다. 많은 이들이 성공만을 보고 달려가는 ‘성과주체’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라는 것이다. 자기애에 빠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울증적 상태에 가깝다. 타자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를 모르고, 그의 다름을 견디지 못하며, 그것과 대면해야 할 상황을 피하는 주체다. 타자는 내 성공을 확인할 때나 필요한, 납작하고 투명한 거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실종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감당해낼 주체가 없어지면 서로에게 타자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미디어로 배달되는 디지털 이미지로서의 타인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나르시시즘적(우울증적) 주체에게서는 사랑이 발생할 수 없다. 타인의 심연 같은 타자성과 충돌하면서 내가 나로부터 빠져나와 거듭나는 드문 체험이 사랑이라면 말이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양자택일이다. ‘우울증이냐, 에로스냐.’


사랑, 죽을 때까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이제 코로나 시대다. 여전히 우울증의 시대이기도 하다. 마스크가 원래 없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감염병 시대 이전에도 어떤 젊은이들은 마스크를 썼다. 그중 한 여성 청년의 말이다. “나와 상관없는 세계일수록, 눈부시게 밝은 시대. 분명 있는데 없다는 느낌이 든다. 걷고 있는데,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이 애달프다고 죽을 것까지는 없다면서 그는 마스크를 쓴다. “입을 가리고, 코를 가리고, 세상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만큼만, 간단한 자살을 하자.” 마스크를 쓴다는 것은, 내가 없다는 느낌 속에서 실제로 나를 조금 없애보는 일이라는 것. 1986년생 일본 시인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 ‘사랑이 아닌 것은 별’(2014)에 수록돼 있는 ‘마스크의 시’다.

타자의 실종과 사랑의 위기라니, 관념의 유희라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시인의 우울한 투정이야 어느 때나 있는 것이라고 냉소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뉴노멀’이라고 말하면 이전의 모든 것이 ‘노멀’이 되어버리는 것처럼(추지현,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고 말하면 이전에는 사랑이 자명하게 있었던 것처럼 돼버린다. 올해 들어 부모님의 가게는 월세를 못 내게 되었고 자신도 아르바이트에서 잘렸을지 모르지만, 취업이 불투명하고 연애 따위 안중에도 없었던 것은 그전부터다. 그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썼던 마스크라는 것. 모두가 마스크를 쓰자 ‘간단한 자살’들이 묻혀버렸을 뿐.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이렇게 ‘여전한’ 일이 ‘더 여전한’ 일이 되는 세계 속에서 사랑은 가능한가?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이시이 유야, 2017)는 위에서 언급한 시인의 시에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청춘 영화라고 해야 하겠지만 속사정은 눈부시지 않다. 낮에는 병원에서 매일 시체를 보고 밤에는 술집에서 남자 손님 말 상대를 해야 하는 여자가 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고 불안할 때면 수다를 떠는, 공사장 일용직 노동을 하는 남자가 있다. 둘은 점선 같은 만남을 이어가지만, 여자는 연애가 사람을 평범하게 만드는 바보짓일 뿐이라고 냉소하고, 남자는 그런 건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잇단 죽음에 휘청거리기만 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릴 것이라는 불안 때문인 것이다. 여기엔 동일본 대지진의 절망이 새겨져 있지만 당연히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서도 세계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무책임한 짓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구도 완전히 절망할 수는 없게 만드는 이상한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일 같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의 끝에서, 이제 연인이 될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가장 짙은 블루’의 밤에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다시 큰 사고로 사람들이 죽으면 어떻게 할까? 모금을 하자. 그리고 ‘잘 잤습니다’와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살자.” 재난 속에서도 타자의 존재를 잊지 않겠다는 것, 일상을 지키면서 그로부터 힘을 얻겠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진, 살아간다는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 : 문학평론가. 저서로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정확한 사랑의 실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있다.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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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 시대, 사랑의 의미를 다시 묻다

‘코로나 19’는 많은 것을 바꿨고 또, 바꾸겠지만,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더 여전한 사랑’을 말한다. 그것을 ‘누구도 완전히 절망할 수는 없게 만드는 이상한 노래’라고 명명하며.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익숙하게 사유하게 됐다는 점이 전 지구적 비극 속에서 우리가 찾은 유일한 ‘이로움’이라고 할 때, 그 범주에 ‘사랑과 연애’를 빼놓을 수 없다. ‘새로운 일상’에서 사랑은 어떤 의미와 역할을 새롭게 부여 받을까. 신 평론가의 글에 인용된 책과 영화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휴버트 드레이퍼스가 쓴 ‘인터넷의 철학’(필로소픽)은 플라톤부터 니체, 데카르트,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을 끌어와 인터넷의 본질에 대해 논한다. 특히, 탈신체화라는 특성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는데, 이는 코로나 시대의 가장 큰 화두인 ‘비대면’ ‘비접촉’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책은, ‘팬데믹 시대’ 사랑의 풍경을 그려보는 데에도 유효하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문학과지성사)는 진정한 사랑이 처한 ‘위기’의 현상과 그 이유를 분석한다. 책에 따르면 사랑에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용기’가 필요한데, 오늘날의 세계는 이를 짓누르는 온갖 함정과 위협이 너무 많다.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때로 타자가 ‘적’으로 간주 되는 지금, 그 리스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추가됐다.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돌베개)은 섣불리 ‘뉴노멀’을 이야기하지 말자는 경고다. 과연 과거의 ‘노멀’(정상)은 ‘노멀’했는지, 코로나가 종식되고, 마스크를 벗으면 세상은 괜찮아지는 것인지, 마스크를 쓰지 않던 시절은 좋았던가 하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비대면, 돌봄, 가족, 노동, 의료 등 10개의 주제어로 코로나19 가 가져온 변화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일본 현대시의 거장 다니카와 슌타로의 명맥을 잇는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 ‘사랑이 아닌 것은 별’과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이상 마음산책)에는 ‘시대의 사랑’을 이해하고자 할 때 맘에 품으면 좋을 시들이 가득하다. 코로나 이전에도 사랑과 연애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걸 일러준다. 그것은 늘 있으나, 늘 주어지는 건 아니다. 이 시인의 시에 영감을 받은 이시이 유야 감독은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를 만들기도 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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