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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21년 04월 05일(月)
시대를 풍미하다 사라지고 기억되고…기술은 ‘인생’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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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놀로지도 태어나 성장하고, 성숙기, 쇠퇴기를 거쳐 죽음에 이른다. 테크놀로지의 일생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동안, 카세트테이프, 수동 전화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술은 사회적 유용성을 다해 일상생활에서 사라져버린다. 게티이미지뱅크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① 사라진 기술이 말하는 것

인류의 편의를 위해 태어났다 유용성 떨어지면 퇴장… 기능 유지된 신기술로 대체되기도
인간 노동과 긴밀하게 연결돼 수많은 삶에 큰 영향… ‘사라진 기술’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


한 시대를 풍미했다 사라진 기술을 통해 테크놀로지의 탄생·성장·죽음의 궤적과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성찰하는 ‘기술이 지나간 자리’는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김태호 전북대 교수, 실리콘밸리에서 기술정책자문으로 일하는 박동오 박사가 번갈아 집필합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에 대한 부고(訃告) 기사가 신문에 실리는 경우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고인이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예술가가 아니라면 장지(葬地)와 발인 날짜, 그리고 유가족 정도만 확인할 수 있도록 짧게 처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고 기사의 전통이 잘 확립된 영어권 신문 지상에는 꽤 다양한 인물의 삶의 궤적을 담은 기사가 매일 여러 편씩 실리곤 한다. 어느 쪽이든 생존해 있는 사람의 부고를 쓰는 경우는 없다. 한 인간이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까지는 그 삶에 대해 종합적으로 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시각각 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았는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나무는 쓰러진 후에야 그 높이를 잴 수 있게 된다.

이 연재에서는 쓰러진 기술에 대한 부고, 즉 태어나서 성장하고, 성숙기를 거친 후 쇠퇴해 죽음에 이른 테크놀로지의 일생에 대한 총평을 시도해 보려 한다. 기술이 생애 주기를 가진다고 보는 것은 무생물인 기술을 생명체에 비유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학자가 이러한 비유에 의존해 기술의 변화를 설명해 왔다. 대표적으로 기술사학자 조지 바살라(George Basalla)는 ‘기술의 진화’라는 책에서 생물의 진화에 대한 논의를 빌려 기술적 인공물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점차 다양해지는 양상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이렇듯 기술을 생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기술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것 역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기술이 태어나는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새로운 기술적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 비밀만 알 수 있다면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의 생식 세포가 만나 핵이 융합하여 수정(受精)되듯이 발명가의 머릿속에서 세상에 없는 혁신적인 생각이 떠올라 ‘유레카!’를 외치는 순간이다. 하지만 기술적 창의성에 대한 많은 사람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 메커니즘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위대한 발명가는 어떻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가? 그것은 번개를 맞는 것처럼 우연한 기회에 찾아오는 것인가? 아니면 꾸준한 노력을 통해 창의적인 사고를 훈련하는 것이 가능한가? 사람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반대로 특정한 테크놀로지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시대를 풍미한 기술의 사회적 유용성이 그 수명을 다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더 이상 이용되지 않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를 기술의 ‘죽음’이라고 받아들일 만하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카세트테이프는 이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이 됐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콤팩트디스크(CD)라는 새로운 저장 매체가 등장하고, 이후 MP3 플레이어가 유행하면서 카세트테이프는 사망선고를 받았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편의에 복무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그 유용성은 당연하게도 영원하지 않다. 유용성이 다한 기술은 무대에서 퇴장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꼭 그런가? 대중에게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기술이 은밀하게 살아남아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는 신진대사를 낮추고 바다 깊은 곳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심해어에 비유할 만하다. 한때 무선호출기가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뒤이어 무선전화가 보편화되면서 무선호출기, 즉 ‘삐삐’는 비교적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한 채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수 직역을 중심으로 여전히 수만 회선의 삐삐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부 병원에서는 휴대전화 전파가 정밀한 의료기기에 오작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사용을 금하고 있다. 이렇듯 2020년대의 시점에서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통신기기인 무선호출기도 특수한 여건하에서는 수요가 남아 있을 수 있다. 물론 삐삐가 1990년대와 같은 전성기를 다시 맞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기준이 맥락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기술이 사라지는 과정은 다양하다. 특정한 제품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경우다. 그러나 특정한 기술 제품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기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요즘에는 예전처럼 ‘디지털카메라’라는 별도의 제품을 쉽게 볼 수는 없게 됐지만, 디지털 방식으로 화상을 촬영해 저장하는 기능은 스마트폰 속에 내장돼 있다. 인간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능은 그대로 유지된 채 새로운 기술이 과거의 기술을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이동’이라는 기능을 충족하기 위해 우마차에서 기차와 가솔린 자동차를 이용하다가 전동차와 전기자동차, 나아가 스마트 모빌리티 제품이 나타나 서로를 대체해 나간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목도하며 기술적 변화를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기도 한다. 이렇듯 기술의 궤적은 한편으로는 매끈한 곡선으로 설명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논리적 연결고리가 없는 복잡다단한 과정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라진 기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흔히 쓰는 격언 중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갓 등장했거나 근미래에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짝반짝한 새로운 첨단 테크놀로지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오랫동안 우리와 일상생활을 같이했지만 어느 순간 시야에서 벗어난 오래된 기술들이 남긴 빈자리의 흔적과 그들의 유산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기술은 많은 경우 인간의 노동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하나의 기술이 없어졌다는 것은 그 특정한 사물이 사라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의 삶에 심대한 타격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경우에는 하나의 기술이 없어졌지만 그와 연결된 인간의 행동은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된 채 유지되기도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기계식 타자기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현재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컴퓨터 자판은 기계식 타자기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새로운 기술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보다 사라진 기술의 부재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술이 사라지면서 남긴 빈자리의 흔적을 추적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없어진 기술”을 검색해 보면 대개 정보기술(IT)과 관련된 최근의 사례들이 나온다. 일례로 한동안 웹 부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국 어도비(Adobe)사의 ‘플래시 플레이어’라는 것이 있었다. 어도비가 2020년 12월을 끝으로 이 서비스에 대한 지원을 종료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플래시 기반의 웹사이트 및 콘텐츠를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이러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IT가 다른 분야에 비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며, 변화에 따른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기 때문일 것이다.

▲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이와는 달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을 다루는 기술 분야는 이보다는 천천히 바뀌고, 한 번 자리 잡은 물건은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문다. 1983년에 구입한 금성사 전자레인지를 최근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사용하다가 LG전자에 기증한 사례를 생각해 보라. 이 연재는 싸이월드와 액티브엑스(ActiveX) 같은 소프트웨어, 모뎀이나 씨티폰 같은 통신기기, 필름이나 책받침 등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기술의 빈자리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여러 테크놀로지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의 궤적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것이 남긴 빈자리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성찰해 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시대에 인간 삶의 조건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 최형섭 교수는 과학기술사 연구자로 기술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공저) 등이 있으며,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기술의 진화

1988년에 출간된 조지 바살라의 ‘기술의 진화’는 기술 변화를 생물 진화에 비유함으로써 영웅적 발명가의 위대한 발명품에 의한 기술 혁명이라는 통념을 뒤집었다. 바살라의 기술진화론은 ‘다양성’ ‘연속성’ ‘새로움’ ‘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기술 변화를 설명한다. 이는 기술이 단일한 궤적을 따라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다양한 생존전략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바살라는 기술의 ‘멸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책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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