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지식카페>스페인 ‘황금의 도시’ 감옥서 ‘제정신을 한 미치광이’가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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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⑤ 세비야와 ‘돈키호테’

세르반테스, 1605년 ‘돈키호테’ 출간… 돈과 물질적 탐욕에 미쳐 인간다움 상실한 세태 통렬히 비판

아메리카 정복 후 얻은 부로 향락·사치 만연… 현실 탈피 꿈꾼 돈키호테, 비록 패배했지만 가슴 뛰게 하는 존재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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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고도(古都)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강 팔로스 항구에서 범선 세 척이 출항했다. 항해를 후원한 것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이었다. 그녀는 남편인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와 힘을 합쳐 레콩키스타, 즉 711년 이후 700년 동안 스페인 반도를 점령했던 이슬람 왕조를 몰아내려는 가톨릭 유럽의 숙원을 이룩한 여걸이었다. 선장은 무일푼 건달로, 인도 항로를 새로 개척해 거대한 부를 쌓겠다는 야심을 품은 모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당대 인도와 그 너머 중국으로 가는 유럽의 바닷길은 지중해 길뿐이었다. 네덜란드에서 출발해 리스본을 거쳐서 지중해로 들어선 후 이집트에서 일단 물건을 내리고, 거기에서 육로로 홍해까지 이동한 후 다시 배를 이용해 인도양을 거쳐 인도 고야에 이르는 항로였다. 이 길을 장악한 집단은 막강한 해군력을 갖춘 베네치아와 이슬람 상인들이었다. 게다가 이 길은 가톨릭교도인 유럽 상인 처지에선 이용하기 어려웠다. 중간에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대서양 연안에서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에, 지중해에서는 베네치아와 오스만제국에 밀린 스페인은 국부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항로가 절실했다. 미덥지 못하고 욕심이 많았으나 상당한 항해술을 갖춘 듯한 콜럼버스에게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지구는 둥글다는 말만 믿고 황금의 땅 지팡구(일본)를 향해 무작정 서쪽으로 나아간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아메리카 대륙이다.

이렇게 우연히 대서양 항로가 발견됨으로써 인류사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피와 학살로 얼룩진 아메리카 정복을 통해서 얻은 부를 이용해 유럽은 비로소 역사상 최초로 동양의 부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운 좋게도 대서양 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스페인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대륙 통치권을 보장받고, 멕시코·페루·볼리비아 등의 금광 및 은광 채굴권을 독점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신대륙 출입을 금지함으로써 단숨에 강국으로 올라섰다. 이로부터 100년 동안 무적함대의 전설과 함께 스페인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기인 ‘황금 세기’가 열렸다. 콜럼버스가 출발했고 또 아홉 달 후 돌아왔던 낡은 도시 세비야 역시 식민지로 오가는 모든 배가 반드시 들러야 하는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가 됐다.

세비야는 ‘태양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州都)다. 푸른 하늘, 끝없는 올리브밭과 포도밭,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등 우리가 흔히 에스파냐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이 ‘올레’의 지방에서 연유했다.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던 세비야는 이베리아 우마이야 왕조가 붕괴한 1010년부터 1248년까지 약 230년 동안 일차 전성기를 누렸다. 세비야를 대표하는 관광지인 알카사르 궁전, 히랄다 탑 등이 이 기간에 건축됐다. 군주이자 시인이었던 알 무타미드 때에는 시의 메카로서 이슬람 전역에서 시인들이 몰려들어 술과 사랑을 노래했다. “오늘은 여명의 날이요 축제일이니, 예쁜 옷을 입고 마음껏 즐기리라.” 가톨릭 재정복으로 다소 쇠퇴했던 세비야는 대서양 항로 개척 이후 ‘황금의 도시’로 거듭났다. 그리고 황금 도시에서 문학 영웅 둘이 태어났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세비야 감옥에서 ‘제정신을 한 미치광이’ 돈키호테를 구상했고, 티르소 데몰리나는 사랑을 그치지 못하는 바람둥이 돈 후안을 창조했다.

스페인의 국민 소설 ‘돈키호테’는 1605년에 처음 출간됐다. 작가 세르반테스의 나이는 쉰일곱 살, 인생 황혼에 이르러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삶은 불우했다. 일곱 살 때, 집안이 망해 빚더미에 올라앉는 바람에 온 가족이 스페인 전역을 떠돌며 살았고, 출세하려고 군대에 들어가 1571년 레판토 해전에 참전해 왼손 장애까지 얻었지만, 귀국 길에 이슬람 해적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보수 적고 멸시받는 직업인 세금 징수원으로 나섰으나, 누명을 쓰는 바람에 감옥에 갇힌다. ‘돈키호테’는 절망 속에서, 즉 “온갖 불편함이 자리 잡고 모든 슬픈 소리가 거주하는 감옥”에서 태어났다.

‘돈키호테’에서 세르반테스는 돈에 미쳐 인간다움을 상실한 당대의 세태를 통렬히 비판한다. “인간의 가치는 가진 것에 달렸어요. 가진 게 많으면 그만큼 값이 나가죠. 요즈음 세상은 아는 것보다 가진 것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해적들이 주축이 된 영국 해군에 의외로 패배하면서 대서양 항로의 스페인 독점 시대가 끝난다. 세르반테스는 진리의 열정보다 물질적 탐욕을 중시하는 세태에서 그 패배와 몰락의 근본 원인을 발견한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은보석, 치솟는 물가와 무너지는 산업, 그러나 서민들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사치와 향락 속에서 영토 전쟁에 몰두하는 왕과 귀족들…. 빈익빈 부익부의 대격차 속에서 다수는 굶주려 죽어 가는데, 아무도 정의를 말하지 않는 타락이야말로 몰락 그 자체다. 촌구석 이달고(하급 귀족)인 돈키호테는 중세 연애소설에서 이와 반대되는 인간, 용기를 발휘해 삶의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잿빛 현실을 황금빛 꿈으로 물들이려는 인간상을 발견한다. 물론, 이미 때는 늦었다. 돈키호테가 묵었던 고풍 가득한 성은 여인숙이고, 싸웠던 거인은 풍차이며, 사랑했던 둘시네아 공주는 이웃집 농부 아가씨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를 눈앞에 데려오라는 요구를 돈키호테는 일축해 버린다. “부인을 보지 않고도 믿고 고백하고 확인하며 맹세하고 지키는 게 중요한 거요.”

시인이 꽃에서 사랑을 보고 불꽃에서 희망을 읽듯, 돈키호테는 물질에 홀린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현실에 맞춰서 살지 않고, 꿈에 맞춰서 현실을 창조한다. 도덕이 붕괴하고 질서가 망가진 세계에 가슴 뛰는 모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기사의 삶을 택해서 자신을 던짐으로써, 스스로는 우스꽝스러워졌으나 모두를 가슴 뛰게 하는 존재가 된다.

돈키호테는 호소한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오. 그리고 프랑스의 열두 기사와 라 파마의 아홉 용사 전부도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오.” 꿈이 있는 한 인간의 삶도, 무의미한 세상도 바뀔 수 있다. 돈키호테는 현실의 자신이 비루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또한 자신이 모험을 통해서 용맹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희망이고, 돈키호테의 명랑성이 영원히 사랑받는 이유다.

답답한 현실 바깥으로 나가길 꿈꾸면서 그에 도전하는 이들은 모두 돈키호테한테서 자기를 발견한다. 더러운 세상에서 받은 “모욕을 되돌려주고 불의를 바로잡고 무분별한 일을 고치고 권력의 남용을 막고 빚은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 역시 그를 보며 위로받는다. 헤르만 헤세는 말한다. “인간은 진부한 신을 위해 고귀하게 싸워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돈키호테 같은 인상을 주겠지만, 돈키호테야말로 완전한 영웅이고 완전히 고귀한 사람이다.”

그런데 돈키호테의 모험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현실은 냉혹하고, 세르반테스는 냉정하다. “집안은 어수선했다. 그러나 조카딸은 식사를 했고, 가정부는 건배를 했으며, 산초는 즐거워했다. 무엇이라도 물려주고 나면 죽는 자가 남기는 고통의 기억은 유산 받은 사람들에게서 지워지거나 희미해지는 법이다.”

돈키호테는 패배한 후 집으로 돌아와 쓸쓸히 죽고, 세상에는 여전히 돈의 축제가 열렸다는 것이야말로 리얼리즘이다. 모험의 헛된 승리를 통해서 이야기 안에서 의미가 이뤄지지 않고, 주인공의 패배를 곱씹는 마음을 통해 독자 안에서 의미가 탄생하고 타락한 세계에 대한 복수심이 싹트게 하는 것, 이것은 삶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세련됨이다. 후대의 작가들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근대 소설의 작법이 탄생했다고 입을 모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달키비르 강변에는 아름답게 솟은 두 개의 탑이 있다. ‘황금의 탑’과 ‘은의 탑’이다. 한때 탑의 겉면을 황금과 은으로 덮었다는 전설이 있는 이 탑들은 이름 그 자체만으로 세비야의 옛 영화를 선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휘영청 달빛 속에서 빛나는 탑들은 여전히 황홀하지만, 강물을 가득 메웠던 범선들도, 열정의 모험가인 돈키호테도 오간 데 없고 무심한 강물만 도도히 흘러간다.

문학평론가

■ 돈 후안은 어떻게 하여 예술가를 사로잡았을까

돈 후안은 티르소 데몰리나의 ‘세비야의 사기꾼과 석상 손님’(1642)에 처음 등장했다. 이후 몰리에르, 바이런, 푸슈킨, 모차르트 등 수많은 예술가가 한 여자만 사랑할 수도 없고 한 번에 두 여자를 사랑할 수도 없는 바람둥이에게 매혹됐다. 그들은 돈 후안에게서 절대 자유를 발견했다.

돈 후안은 예술 자체였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 완전한 방탕이 그의 삶이었다. 연인도, 가족도, 도덕도, 관습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누구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소유되지 않음으로써 그는 소유를 모르는 반자본주의적 인간이 됐다.

또한 돈 후안은 삶을 기쁨으로 채우는 법을 알았다. 그는 노소와 미추와 지위를 가리지 않고 여자들을 사랑했다. 조건 없이 삶의 모든 순간을 즐기는 사람은 매력적인 법, 이 나쁜 남자에게 사람들이 속절없이 끌리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