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은 도시 상인 철학 반영… 속세 떠난 ‘無爲’ 해석은 잘못”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최근 자신이 평역한 ‘채근담’을 펼쳐 든 채 이야기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 오역·누락 바로잡은 ‘채근담’ 펴낸 안대회 교수

“한·중·일서 나온 기존 번역서
저자 홍자성·원본 이해 부족

현실에 맞서는 생활철학 아닌
자기만족 처세술 담은 책 오해

고단한 세상서 얻은 고민·질문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큰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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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은 중국 명·청 시대 가장 왕성한 상업 문화를 꽃피운 안휘성(安徽省) 휘주(徽州) 상인의 처세술과 경영법, 상업 윤리가 스며든 잠언집입니다. 이를 은둔과 자연 친화, 자기만족의 소극적이고 퇴영적인 처세를 강조한 책으로 해석한 것은 ‘채근담’이 지닌 도회지 시민의 생활 철학을 간과한 것입니다.”

동양 고전 전문가인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로 국내에만도 수십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 ‘채근담’을 새로 평역해 출간(민음사·사진)한 이유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온 기존 책들 대부분이 저자인 홍자성과 원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로 번역됐을 뿐만 아니라 오역과 누락, 잘못된 해설 등으로 ‘채근담’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안 교수는 “‘채근담’은 좌절하거나 도망하지 않고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생활 철학을 담고 있다”며 “400년 전에 나온 이 책이 험한 바다와 큰 강을 건너는 현대인들에게도 구명정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안 교수 연구실을 찾아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 교수는 이번 평역서의 가장 큰 성과로 베일에 싸여 있던 홍자성의 실체를 밝혀낸 점을 꼽았다. “홍자성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었다. 원황이라는 사람이 ‘홍자성 씨는 신도(新都)의 제자다’라고 밝힌 글이 전부였다. 이 때문에 홍자성이 사천성(四川省) 신도 출신이라는 게 정설처럼 자리 잡았다. 그런데 홍자성이 휘주 소금상인 가문 출신 왕도곤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신도는 당시 문단의 맹주였던 왕도곤의 고향 지명이다. ‘채근담’ 초간본에 관여한 우공겸과 왕건초, 홍자성의 또 다른 책에 관여한 원황과 풍몽정 등도 모두 왕도곤과 친분이 깊은 사람들이다.”

홍자성이 왕도곤과 학연·지연으로 얽혔다는 사실은 ‘채근담’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 내용을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홍자성의 철학을 현실 도피와 자기만족의 처세술로 오인해선 안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채근담’의 내용은 홍자성의 철학이 도회지 사람의 생활 철학임을 보여준다. ‘속세를 끊고 고결하기를 구하는 자는 고결한 사람이 아니라 괴벽한 사람이다’(전집 167칙), ‘권세와 이익, 인맥과 사치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 하지만 가까이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그보다 더 깨끗하다’(전집 4칙) 등이 대표적이다. 구성 면에서도 ‘채근담’은 한창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전집이 222칙으로, 은퇴한 사람을 청자로 한 듯한 후집(141칙)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송나라 병법서 ‘무경총요’에 실린 그림. 병사들이 양가죽에 공기를 채운 공기 부대를 겨드랑이에 메고 급류를 건너는 모습이다. ‘채근담’을 평역한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험난한 세태를 견뎌내야 할 현대인들에게 이 책이 공기 부대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민음사 제공

이번 평역서는 홍자성이 직접 펴낸 초간본(初刊本)을 번역했다는 점에서도 기존 번역서들과 차별화된다. 중국에서조차 청나라 시기 만들어진 청간본(淸刊本)이 널리 유통돼 초간본은 단 두 권만 전해지고 있다. 안 교수에 따르면 청간본은 무명 편집자나 출판업자가 짜깁기한 위서에 가깝다. 한국에서 널리 유통된 ‘채근담’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화각본(和刻本)을 저본으로 했는데, 여기에는 후집의 136~141칙이 빠져 있다. “‘채근담’은 명나라 시대에 나온 수백 종의 청언(淸言)을 대표하는 책이지만, 처음 나온 지 200년 정도 지난 18∼19세기 무렵 인간 소외 같은 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 때문에 현대 번역본은 많은 오류가 있다. 이번 평역서가 저자의 원뜻을 훼손하지 않고 가장 정확하게 번역·해설한 정본·정역서라고 자부한다.” 안 교수는 함축적인 말로 고결한 취향이나 처세의 교훈, 인생관 등을 표현한 청언의 시적인 특징을 살리는 데도 많은 공을 들였다.

17세기 도회지인의 생활 철학이 2022년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안 교수는 홍자성이 현실 세계를 험난하고 결함 많은 삶의 현장으로 봤으면서도 세상에 좌절한 염세주의나 아예 현실과 담 쌓은 결벽주의로 흐르지 않은 데 주목한다. “‘채근담’에는 도회지에서 많은 사람과 부대끼면서 어떻게 하면 실패하거나 좌절하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과 인간관계를 잘 맺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와 같은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다양한 질문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현대인들도 책을 읽으면서 ‘내 문제와 같다’ 싶은 게 많을 것이다.”

안 교수는 송나라 병법서 ‘무경총요’에 실린 그림을 예로 들며 ‘견뎌내라’는 홍자성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 그림은 양가죽에 공기를 채운 부대를 활용해 급류를 건너는 병사를 담았다. “‘채근담’은 제목부터 ‘풀뿌리를 씹는 이야기’(菜根譚)다. 먹을 게 없어 기아선상에서 허덕일 때 풀뿌리라도 씹으며 견디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노력하면 좋아질 수 있다는 이 이야기야말로 책 전체의 주제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이 이 책을 급물살을 건너기 위한 공기 부대로 활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는 전집 180칙의 내용과 통한다. “견딘다는 한마디는 의미가 지극히 깊다. 만일 비뚤어지고 험악한 인정과 힘겹고 험난한 세상길에서 견딘다는 한마디를 얻어 꽉 붙잡고 지나가지 않는다면 어찌 가시덤불이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