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우크라니아 키이우 한복판을 흐르는 드니프로강 주변의 풍경.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크라이나 땅의 역사는 대부분 이 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게티이미지뱅크
■ 장은수의 지식카페 - (14) 자유의 도시 키이우
1700년 역사 키이우, 동유럽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동슬라브족 정착하며 흑해·지중해 교역의 중심 자리매김
오랜 외세의 지배 속에서도 자유 갈망…평화 속 셰우첸코의 서사시 “적들의 피로써 자유 굳게 지키라” 읊게 되길
“우리 형제들은 코사크의 후예임을 증명할 것이네./ (중략)/ 누구도 우리 모국을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네./ 흑해는 여전히 미소 지을 것이고, 할아버지 드니프로강은 기뻐할 것이네./ (중략)/ 우리의 자유를 향한 외침은 우크라이나 전역에 퍼질 것이네./ 자유는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나타나고, 초원을 가로질러 울릴 것이네.”
타라스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에서 노래했다. 이 시에는 외세의 지배와 압제 속에서 자유를 열망해 온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정신이 압축돼 있다. 코사크, 자유, 흑해, 드니프로강, 초원…은 우크라이나 하면 우리 머릿속에 우선해 떠오르는 것들이다.
키이우는 동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전설에 따르면, 도시 이름은 6세기 후반 도시를 건설한 키이, 시첵, 호리우, 리비드 등 네 남매 중 맏이 이름을 딴 것이다. 키이우 한복판엔 드니프로강이 흐른다. 발다이 구릉에서 발원해 동유럽평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흑해까지 흐르는 이 강은 북유럽 흑해 지역과 비잔틴 제국을 연결하는 핵심 무역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크라이나 땅의 역사는 대부분 이 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강 양안으로 유럽 최대의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 평원이 펼쳐지고, 그 끝이 시베리아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유라시아 초원지대로 이어지면서 동서양의 진귀한 산물을 교역품으로 빨아들인다. 수많은 목조요새와 수도원, 해로·육로·수로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이 교역로를 장악하는 자는 풍요를 대가로 받고, 유라시아의 강자로 올라설 수 있다. 드니프로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있는 키이우는 그 요충지였다. 흑해와 지중해를 항행하는 모든 선박이 집결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882년 슬라브인은 바이킹 왕자 류리크를 초청해서 이곳을 수도 삼아 나라를 세웠다. “우리 땅은 넓고 비옥한데, 질서가 없습니다. 와서 우리를 통치해 주오.” 류리크와 그 일족은 스스로 ‘루스’라고 불렀다. 이들이 세운 동슬라브족 최초의 국가 키이우 루스는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 공동으로 자리 잡고, 키이우는 ‘모든 루스 도시의 어머니’이자 ‘동슬라브인의 심장’이 됐다.
10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에서 정교를 받아들여 종교를 통일하고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키이우는 ‘세 번째 로마’로 도약을 시작했다. 11세기 루스의 세력이 동유럽평원 전체로 퍼지자 키이우 인구는 4만5000명에 달했다. 야로슬라우 현공은 성소피아 성당과 페체르스크 수도원을 짓고 도서관을 세워 종교와 문예를 진흥했으며, 성벽을 강화하고 황금의 문을 건설했다. 그 아들은 황금 돔으로 유명한 미하일 성당을 건축했다. 12세기 초 키이우는 유동 인구 1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당대 유럽에 이보다 큰 도시는 드물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 비잔틴 제국이 힘을 잃고 베네치아공화국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자 동서 무역의 통로가 지중해로 옮겨졌다. 발트해-흑해 무역의 비중이 줄어들고 형제 승계에 따른 루스 내부의 분열도 심각해져 키이우의 몰락이 시작됐다.
“드니프로, 나의 영광이여!/ 이고리 공을, 나의 주인을, 잘 보살펴다오,/ 저 먼 곳에서도 잘 지켜다오,/ 부디 내가 지금의 눈물을 잊고,/ 그가 내게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중세 루스 문학의 걸작 ‘이고리 원정기’에서 야로슬라브나는 뻐꾸기처럼 울면서 남편의 귀환을 호소한다. 이 서사시는 이교도 유목 민족에게 복수하려고 원정을 떠났던 이고리의 처절한 패배, 회한에 찬 억류 생활, 탈출과 귀환을 다룬다. 시인은 분열과 투쟁을 일삼는 지배계급의 각성, 유목 민족의 위협에 대한 루스인의 단결을 촉구한다.
그러나 1240년 몽골군이 초원을 가로질러 쳐들어왔다. 분열된 루스는 멸망했고, 키이우는 초토화되고 버려져 한동안 사람들이 살지 못할 정도로 파괴됐다. 루스는 할리치나-볼린, 노브고로드, 모스크바 공국 등으로 나뉘고, 동슬라브의 중심지는 결국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구로카와 유지는 말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루스라는 이름까지 모스크바에 빼앗겼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나라를 나타내려고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우크라이나는 슬라브어로 ‘변경, 지방, 국경’을 뜻한다. 이때의 변경은 러시아가 아니라 폴란드의 변경이란 뜻이다.
우크라이나 땅은 몽골 지배를 거쳐 리투아니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주변 강국에 분할된 채 700년 동안 외세 지배를 받았다. 특히, 1569년 루블린 조약에 따라 폴란드에 편입된 것은 이 땅에 큰 흔적을 남겼다. 르비우 등 서부지역이 가톨릭 세력권에 들어간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민족적·종교적으로 러시아와 분리되고, 우크라이나어가 폴란드어 영향을 받아 러시아어와 뚜렷이 구분된 계기였다.
그러나 폴란드의 강압적 착취와 강제 가톨릭화 정책은 우크라이나 민중의 대대적 반발을 불러왔다. ‘타라스 불바’에서 니콜라이 고골은 말했다. “권리가 조롱당하고 풍속이 짓밟힌 일에 대항해, 수치스러운 모욕에 대항해, 조상의 신앙과 신성한 관습이 능욕당한 일에 대항해, 교회에 대한 모독에 대항해서 그들은 봉기했다. 오래전부터 코사크 민족을 억압해 온 모든 것에 대해 복수하려고 봉기한 것이었다.”
타타르, 폴란드 등 외세와 싸우는 과정에서 드니프로강 동남부를 중심으로 코사크가 형성됐다. 코사크는 튀르크어로 ‘노획품으로 생활하는 사람’ 혹은 ‘자유의 민족’을 뜻한다. 이들은 자유를 찾아 초원지대로 탈출한 우크라이나인과 소수 이민족이 합쳐진 세력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민족정체성의 중심에 있는 코사크는 “군주가 거칠게 다루면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 드니프로강 하류에 있는 요새 자포리자의 라다 의회에서 선출된 헤트만이 전체를 이끌었다.
용병으로 싸우면서 코사크의 지위가 향상되자, 페트로 사하이다치니 헤트만은 몽골 침략 이후 시골 마을로 전락한 키이우를 부흥시켜 우크라이나 문화, 교육, 정교를 진흥했다. 1632년 세워진 키이우 모힐라 아카데미는 1817년 탄압으로 폐쇄될 때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민족주의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키이우의 성니콜라스 대성당. 게티이미지뱅크
사하이다치니의 뒤를 이은 보흐단 흐멜리츠키는 페레야슬라우 조약을 통해 모스크바 공국과 동맹을 맺고 폴란드에 저항해 최초의 코사크 국가를 창건했고, 이반 마제파는 러시아 제국의 압박을 극복하려고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표트르대제에게 저항하다 1709년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다. 마제파는 선언했다.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그 아무도 우리를 통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코사크는 자주 방어를 위해서 서로 연합해 노력할 뿐이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1991년 완전히 독립할 때까지 오랫동안 모스크바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압제 아래 ‘소러시아’로 불렸을 때, 키이우, 하르키우, 르비우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불타올랐다. 셰우첸코와 미콜라 코스토마로브가 이끈 ‘키릴-메토디 형제단’과 그 후예인 키이우 흐로마다, 타라스 형제단 등이 중심이었다. ‘유언’에서 셰우첸코는 노래했다. “나 죽거든 잠들게 해 주오,/ 그리운 우크라이나/ 넓은 벌판 위에./ (중략)/ 이 몸을 땅에 묻거든/ 그대들이여,/ 떨치고 일어나/ 예속의 사슬을 끊으라./ 적들의 피로써/ 자유를 굳게 지키라.”
러시아는 엠스 칙령(1863)을 내려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가혹한 탄압으로 맞섰다. 그러나 자유를 열망하는 키이우 시민을 막을 순 없었다. 1917년 시위대 10만 명이 키이우에 모여들어 자치를 선언하고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을 세웠다. 이어서 볼셰비키와 장렬한 전쟁에 돌입했으나, 1921년 세력이 밀려서 해체당했다. ‘백위군’에서 키이우 출신의 러시아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는 열네 번이나 주인이 바뀐 키이우 공방전을 선연히 보여준다.
1930년대 코사크는 끔찍한 비극에 시달렸다. 약 350만 명이 러시아 수탈로 인한 대기근으로 ‘유럽의 빵 바구니’인 땅에서 굶어 죽었다. 이어 나치 침략과 학살로 다시 우크라이나인 수백만이 목숨을 잃고, 키이우 시내의 85%가 파괴됐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키이우의 꿈은 잠들지 않았다. 1990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함께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1991년 몽골 침탈 이후 750년 만에 키이우는 자유를 되찾았다.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코사크와 소아시아 : 폴란드 수탈에 저항해 도망친 우크라이나 농민이 드니프로강 동남부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코사크는 자유를 지키고, 타타르인의 약탈로부터 경작지를 보호하려고 강력한 무장 세력이 됐다. 이들은 폭도이면서 기사이고, 강도이면서 전사이고, 해적이면서 기병이고, 유목민이면서 농민이었다. 코사크가 되려면,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써야 했고, 정교를 믿고 엄격한 규칙에 복종해야 했다.
코사크에게 ‘우크라이나’는 조국이란 의미를 담은 정치적, 시적인 단어였다. 17세기 드니프로강 동쪽 땅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2세가 우크라이나 땅 대부분을 점령한 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주로 ‘소러시아’란 이름으로 불렀다. 코사크의 자유를 기억하는 타라스 셰우첸코 같은 이들한테 이 말은 수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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