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호주 시드니의 임상시험 전문기업 사이언티아에서 지난 4일 연구자가 임상 시험자의 의료 샘플을 살펴보고 있다.
■ 글로벌 이코노미 - ‘韓·濠 보건의료 R&D 협력 현장’ 가보니…
인구 표본 美·유럽 임상 기준 부합
임상 시작도 미국보다 4개월 빨라
제약회사 초기 시험 땐 세제혜택도
시드니 인근 40만㎡ 최대 의료단지
병원·연구소·대학교 한 곳서 협력
韓 셀트리온·대웅제약도 濠서 연구
시드니·멜버른 = 박세희 기자
딱 공항까지였다. 시드니 공항을 나서자마자 마스크를 벗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호주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호주의 시드니, 멜버른 시민들은 마스크 없이 거리를 활보했고 각종 식당과 펍(pub)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일주일 일정에 대비해 챙겨간 마스크는 대부분 쓰지 않은 채 다시 한국으로 가져왔다.
멜버른이 속한 빅토리아주의 봉쇄 기간은 263일, 시드니가 속한 뉴사우스웨일스(NSW)주의 봉쇄 기간은 159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봉쇄 기간이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호주의 경기는 침체돼 2020년은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한 해로 기록됐다. 시민들의 삶도, 경제도 ‘암흑’이었던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이었지만 거의 유일하게 성장한 분야가 하나 있다.
의료 분야다. 특히 임상시험 업계에서 호주의 인지도와 평판은 크게 올라갔다. 지난 3∼9일 한국여성기자협회가 마련한 팬데믹 시대 한·호주 보건 의료 연구·개발(R&D) 협력 현장 기획취재에서 호주 NSW주와 빅토리아주의 유명한 임상시험 기업 사이언티아(Scientia)와 뉴클리어스 네트워크(Necleus Network), 웨스트미드 의료단지와 모나시대학교 등을 찾았다. 호주 NSW주와 빅토리아주는 미국의 의료 거점으로 유명한 보스턴을 빗대 “남반구의 보스턴이 될 것”을 자신하며 한국과의 협력에 기대를 표했다.
◇호주 임상시험의 강점은 ‘다민족’·‘신속성’·‘저렴한 비용’ = “호주에서는 ‘외국인’을 뜻하는 ‘Foreigner’라는 단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빅토리아주의 애덤 커닌 동북아시아 담당 참사관은 전했다. 호주라는 국가 자체가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기도 하고 호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구별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 실제로 NSW주에 살고 있는 사람의 거의 3분의 1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NSW주 내에서만 275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인구학적 특성’이 호주를 ‘임상 강국’으로 만드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단일민족인 한국에서 신약에 대한 임상을 할 경우 미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의약품청(EMA)의 승인을 받기 힘들다. 두 기관 모두 모든 임상 단계에서 다양한 인구집단을 포함하도록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민족, 다인종 국가인 호주는 다양한 인구집단을 포함한 임상이 가능하며, 특히 아시아계나 백인, 흑인에 대한 임상을 각각 따로 진행하는 것도 용이하다. 커닌 참사관은 “호주에서 시행하는 임상은 FDA, EMA의 지침을 완벽히 준수하고 있어 바로 승인 신청이 가능하다. 상업화를 위한 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호주 임상의 또 다른 강점으로는 ‘빠른 속도’를 꼽을 수 있다. 임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윤리위원회(Human Research Ethics Committees)의 승인이 필요한데 승인을 신청하고 승인받기까지의 과정을 담당해주는 주 정부 연계 기업이 있어 이 기간을 4주 정도로 단축할 수 있다. 뉴클리어스 네트워크의 제프리 웡 사업개발 디렉터는 “미국에선 임상을 시작하기까지 4∼6개월 정도 걸리지만 호주에선 승인에 4주, 임상 참가자 모집에 4주 등 늦어도 2개월 정도면 시작할 수 있다. 제약회사에 ‘시간은 돈’이다. 호주 임상의 가장 큰 혜택”이라고 강조했다. 저렴한 비용도 강점인데 호주무역투자대표부에 따르면 초기 임상시험에 대한 세제 혜택도 마련돼 있어 미국에 비해 60% 저렴한 수준이다.
팬데믹으로 호주 임상 기업들은 더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웡 디렉터는 “봉쇄 기간이 길었지만 빅토리아주 정부가 임상시험 업계를 ‘필수 직군’으로 지정해 전 세계적으로 임상시험을 하는 곳이 적어진 가운데서도 우리는 아무런 차질 없이 계속할 수 있었다”며 “오히려 코로나를 겪고 난 뒤 우리가 임상시험, 연구·개발을 잘할 수 있는 도시로 각광받았다”고 말했다.
◇핵심은 ‘의료 생태계…팬데믹 계기 mRNA 기술 개발도’ = “호주에는 님비현상(Not In My Backyard·지역 이기주의)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나라인 호주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약 78배. 인구 밀도가 적어 혐오 시설과 주거 지역이 확연히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호주는 곳곳에 헬스 프리신트(Health precinct·보건의료 대단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드니 중심부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이동해 도착한 웨스트미드 의료단지는 40만㎡ 규모의 NSW주가 자랑하는 최대 의료단지로, 도보로 모든 곳을 다니기 힘들 정도였다. 웨스트미드 의료단지는 무엇보다 병원과 연구소, 대학이 한 곳에 모여있어 협력이 잘 이뤄진다는 것을 최대 강점으로 내세웠다. 빅토리아주도 멜버른대와 모나시대를 중심으로 일종의 의료 연구 ‘구역’이 설정돼 있는데 이들은 연구·개발과 실제 환자 치료, 치료제 등 상용화가 하나로 이어지는 의료 생태계(Ecosystem) 조성을 위한 것이다. 호주가 의료 생태계 조성의 필요성을 깨달은 것은 약 20년 전. 이를 주도한 어맨다 케이플스 mRNA 빅토리아 과학자문위원장은 “항암 치료에서 중요한 과립구집락자극인자(G-CSF)에 대한 중요한 발견을 호주에서 했지만 당시 의료 생태계가 조성돼있지 않아 이를 더욱 발전시키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의료 생태계 조성에 힘을 쏟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항공기 블랙박스와 바이오닉 이어(Bionic ear·생체공학적 귀)도 호주에서 발명됐지만 상용화는 더뎠다는 안타까움이 의료 생태계 발전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이어지는 동안 빅토리아주 대부분의 연구소에서 약 1년간은 코로나19 관련한 연구만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에 이 기간 mRNA 기술이 크게 발전, 현재 호주의 첫 자체 코로나19 mRNA 백신이 1상을 진행 중이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이 엔데믹(풍토병)으로 전환되면서 호주의 mRNA 기술 연구는 향후 항암 등 다른 질병 치료로 초점을 변경하고 있다.
호주에서 만난 의료 분야 관계자들은 모두 한국과의 협력에 큰 기대를 나타냈다. 최근 한국의 셀트리온과 아이진, 대웅제약의 신약 전문 자회사인 아이엔테라퓨티스 등은 임상 지역으로 호주를 선택했고, 다음 달 11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열리는 바이오코리아 행사에도 호주 기업 19개가 참여할 예정이다. 바이오멜버른 네트워크의 CEO 제프 말론은 “연구부터 임상, 상용화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으로 행할 수 있는 호주로 올 것을 한국 기업들에 요청하고 싶다”면서 “멜버른은 ‘남반구의 보스턴’이 될 것이다. 나아가 한국과의 협력으로 보스턴을 ‘북반구의 멜버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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