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타초 노잼남’의 반전…‘듣는 힘’으로 日 정치판을 사로잡다

■ 베스트 리더십 - 참의원 선거 압승 이끈 기시다 후미오 日 총리

임기초엔 무색·무취‘약체’ 평가…허수아비 총리 불려
외교무대·코로나 대책 등 호평… 8개월만에 확 달라져
野 공격도 잘 듣고 메모…아베 측근 경질 등 추진력도
상왕 아베 사망·선거없는 3년…‘자기색 찾기’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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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상식적이고 온건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총리가 된 뒤에도 당내 강경 보수파와 진보세력의 의견까지 다 들어보고 포괄적인 중재안을 찾아내려 하는 걸 높이 평가한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7월 초 만난 정치·외교 전문가들은 기시다 총리에 대해 한목소리로 “임기 초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이제는 기시다 총리가 장기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10월 취임 당시만 해도 ‘무색·무취’, ‘허수아비’ 이야기를 듣던 기시다 총리에 대한 평가가 집권 8개월 만에 확 달라진 것이다. 특히 지난 10일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하면서 중요 선거가 없는 향후 3년간 총리직을 보장받았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8년여를 집권하며 역대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지난 8일 총격 피살을 당하면서 기시다 정권에 압박을 넣던 ‘상왕’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기시다 총리 자신과의 싸움이다. 총리 취임 뒤에도 트레이드 마크인 ‘기시다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보여준 ‘경청의 리더십’은 아베 전 총리 사후 펼쳐질 자민당 계파 다툼에서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할까. 아니면 강경 성향의 아베파 흡수를 위해 ‘온건파’ 기시다 총리가 우(右)클릭할까. 혼란의 일본 정국의 향배를 결정짓는 열쇠는 바로 기시다 총리가 쥐고 있다.

◇‘나가타초 최고의 노잼남’이지만 “경청이 내 강점” 어필하며 야당·언론 마음 사로잡았다 = 지난해 총리 취임 전까지 기시다 총리의 별명은 ‘나가타초(일본 의회가 있는 지역) 최고의 노잼남(재미없는 남자)’이다. 기시다 총리는 대화·타협을 강조해온 온건파이자 역대 총리 4명을 배출한 명문 파벌 ‘고치카이(宏池會·현재 기시다파)’의 수장이다. 특히 그는 1993년 중의원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한 뒤 자기 색을 드러내지 않고 권력자인 아베 신조(安倍晋三)·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총리의 정치적 의향에 맞춰 최측근으로서 보좌하는 ‘참모형 인재’였다. 알맹이가 없는 발언을 일삼은 데다가, 2020년까지 본인 철학을 담은 저서 한 권도 없어 ‘비전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는 2016년 주간 아사히(朝日) 인터뷰에서 “정치 슬로건이나 이데올로기에 휩쓸리지 않고 국민 목소리를 들으며 지극히 현실적인 대응을 하는 집단이 고치카이”라며 경청의 힘을 강조했다. 실제로 ‘경청’의 리더십은 기시다 총리의 최대 무기로, 평가 역시 호의적이다. 일본 매체들은 ‘약체로 평가받던 기시다 총리가 예상을 깨고 외교와 코로나19 대응에 있어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 5월 미국과 함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발족했는데, 태평양전쟁 이후 역대 2번째로 외무상을 오래 지낸 ‘외교통’ 기시다 총리가 입안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기시다 총리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기존 정책을 수정하는 유연성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12월 임시국회에서 주요 쟁점이었던 18세 이하 아동 대상 코로나 지원금에 대해서도 현금과 쿠폰(상품권) 동시지급을 추진하다가 비판을 받자 현금 전액 지급으로 방향을 바꿨다. 의회에서 야당 인사들의 날카로운 공격에도 “검토해보겠다” “말씀하신 부분을 유의하겠다”고 답하면서 ‘기시다 노트’에 메모를 한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오가와 준야(小川淳也) 정조회장조차 “우리 질문에 메모까지 하며 답변하는 총리는 처음 봤다”고 호평할 정도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기시다 후미오(왼쪽 두 번째) 일본 총리가 1993년 작고한 부친의 뒤를 이어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직후 유코(오른쪽) 여사와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사진은 유코(왼쪽 두 번째) 여사와 세 아들이 2020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한 기시다 총리를 응원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모습. 오른쪽 사진에서는 기모노 차림의 유코(오른쪽) 여사가 지난 5월 24일 일본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우려낸 말차를 대접하고 있다. 페이스북 ·마이니치 신문·일본 총리관저 트위터 캡처

◇아베 측근 인사 경질하고, ‘아베 국장’ 결정하는 의외의 추진력도…‘황금의 3년’ 이끌 리더십 주목 = 기시다 총리가 유연하기만 한 게 아니다. 의외의 결단도 보여주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10월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의 압승을 이끈 뒤 아베 전 총리 등 당내 보수파와 거리를 두며 ‘자기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총재 당선 직후에도 당내 보수파 거물인 아베와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아소 다로(麻生太郞) 등 이른바 ‘3A’의 측근을 요직에 중용하면서도 신임 외무상에는 아베 전 총리가 강하게 반대한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를 임명했다. 하야시 외무상은 고치카이파의 2인자로 ‘아시아주의’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와의 대화·협력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또 기시다 총리는 지난 6월에는 아베 전 총리의 최측근이자 급격한 방위비 증액을 주장해온 시마다 가즈히사(島田和久) 방위차관을 전격 경질했다. 아베 전 총리 측 반발에도 뜻을 관철시킨 것.

이런 상황에서 아베 전 총리가 참의원 선거 유세 중 총격으로 사망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고, 여기서도 기시다 총리의 ‘결단’은 돋보였다. 기시다 총리는 피격 다음 날 “폭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여러분 앞에 서서 계속 호소하겠다”며 유세를 전격 재개했다. 기시다 총리의 결단에 유세를 일시 중단했던 입헌민주당 등 다른 정당들도 유세를 재개했다. 결국 기시다 총리는 ‘보수층 몰표’를 받으며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 앞으로 3년간 대형 선거가 없는 ‘황금의 3년’ 시대를 맞게 됐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친(親)개헌 4개 정당이 개헌 발의 정족수인 3분의 2(166석)를 훌쩍 넘는 177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개헌 추진 카드도 손에 쥐게 됐다.

기시다 총리는 1993년 중의원 입성 동기였던 아베 전 총리에 대한 의리와 예우도 잃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 전 총리의 장례식을 오는 9월 도쿄 부토칸(武道館)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르겠다고 밝혔다. 일본 언론은 기시다 총리가 수장인 아베를 잃고 흔들리는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를 배려하기 위해 포용력을 발휘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상왕’ 아베 전 총리가 비극적인 사건으로 떠나며 당내 보수층을 중심으로 ‘아베 신격화’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가 ‘황금의 3년’ 간 자기 색을 얼마나 드러낼지가 정치인 기시다 후미오와 일본 정치의 미래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김선영 기자 sun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