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교의 시론]文의 ‘꽃길’에 사기당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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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2-12-3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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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교 정치부장

文 “꽃길만 걷게 해줄게” 약속
탈원전·불공정·집값 급등 피해
광기 가득 찬 정책 후폭풍 일어

尹 ‘달콤한 속삭임’ 하지 않아
각종 대내외 여건은 가시밭길
정부 역할에 냉정한 판단 필요


2017년 8월 20일, 기억이 생생하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 광화문 세종로 한글 공원에 ‘광화문 1번가’라는 공간을 마련했다. 커다란 임시 벽을 세워놓고 노란색 포스트잇을 붙여 국민정책제안을 받았다. 어딘가 세월호 노란 리본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이날 출범 100일을 맞은 문 정부는 100개 국정과제를 설명하는 행사를 가졌다. 타운홀 미팅식으로 진행된 보고회는 부처 장관들과 청와대 수석들이 총출동했다. 사회를 봤던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약속’이라며 행사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카메라가 내부로 ‘줌 인’되자 가수 데이브레이커는 ‘꽃길만 걷게 해줄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인공답게 문 대통령은 행사 후반부에 등장했다. 기립박수에 스포트라이트가 터졌다. 꽤나 잘 짜인 연출 무대였다.

문 정부는 각종 정책을 쏟아냈다. 문 대통령은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표방했다. 이후 5년 동안 370개 공공기관에서 비정규직 10만172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탈원전을 내걸고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중단시켰고, 신한울 1·2호기와 월성 1호기 등 원전 5기를 가동 중단 또는 폐쇄했다. 주 52 시간제로 실질근로시간을 주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였고, 2017년 6470원이었던 최저임금(시급)도 급격히 올려 나갔다. 집값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출범 첫해 6·19대책과 8·2대책을 비롯해 크고 작은 부동산 대책을 임기 중에 30여 차례나 내놓았다.

그 정책들 곳곳에는 광기가 가득했고, 자연히 혼란과 분열이 이어졌다. 공공기관에서는 노사 갈등과 노노 갈등이 속출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대폭 전환되면서 신규 고용이 줄어들어 불공정 논란을 빚었다. 방만 경영으로 2016년 말 499조 원이었던 공공기관 부채는 2021년 말 563조 원으로 급증했다. 탈원전 정책에 따라 원전 5기가 12월까지 생산하지 못한 전력량은 387억㎾h에 달했다. 결국, 발전단가가 ㎾h당 52원70전인 원전 대신 232원80전을 주고 LNG 발전을 해야 했다. 원전이 제대로 가동됐다면 6조9701억 원을 아낄 수 있었던 셈이다. 근무시간이 줄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일자리도 늘어날 것으로 보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2017년 66.6%였던 고용률은 2021년 66.5%로 큰 변화가 없었다.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부업에 나서는 가구주만 늘어났다.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자신의 책 ‘부동산은 끝났다’에서 ‘집 소유자는 보수적인 투표 성향을 보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진보적 성향이 있다’고 언급했다. 진보층을 늘리려는 생각이었는지, 문 정부는 집 소유자에게 불이익을 줬다. 주택분 재산세는 2016년 1조5783억 원에서 2021년 5조1967억 원으로 늘었고, 같은 기간 종합부동산세도 3208억 원에서 5조6789억 원으로 증가했다. 정책 의도와 달리 집값은 폭등했고 서민들은 영혼까지 끌어모은 추격매수에 나섰다.

12월 29일, 윤석열 정부는 ‘국민제안 정책화 목록 과제’를 발표했다.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은 다소 경직된 얼굴로 “지난 9월부터 받은 국민제안 2만여 건 중 360건의 제도개선 검토대상 과제를 1차 발굴해 이 중 17건을 선정해 정책화를 추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화려한 무대도, 조명도, 노래도 없었다. 장관들과 수석들도 발표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5년여 전 문 정부가 받은 18만705건 국민제안의 11%에 그친다. 선정된 국정과제 건수도 17%에 불과하다. 그 시간에 윤 대통령은 대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북한 무인기 대응 체제와 감시·정찰 요격시스템 등 개발 현황을 점검했다.

새해에는 버스·전기·가스 요금 인상 청구서가 집집마다 현관문 앞에 쌓일 것이다. 채용 기회를 차단당한 취업준비생들의 한숨 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대외 경제 여건과 북핵 문제 등 모든 상황이 녹록지 않다. 40%를 갓 넘긴 지지율이 말해주듯 윤 정부 국정 운영은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도 희망이 엿보이는 것은 국민 귀에 ‘꽃길만 걷게 해줄게’라는 달콤한 속삭임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22대 총선에 불리한 노동·연금·교육의 3대 개혁을 밀고 나가려는 의지도 마찬가지다. 어떤 정부가 국민을 위하는지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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