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NCT 도영 생일카페의 풍경. 도영의 사진과 굿즈 등으로 꾸며져 있다.
■K팝의 탄생 현장을 가다 - (5) 팬덤의 탄생 <끝>
멤버들 생일 맞으면 공간 빌려
사진·굿즈 채워 ‘팬만의 파티’
컴백 땐 음원차트 ‘스밍 총공’
SNS서 ‘인증’ 이벤트 열기도
콘텐츠 감상자→생산자 맡아
홍보 영상 직접 만들어 올려
현수막 재질까지 꼼꼼히 살펴
곳곳에 내걸어 화제 모으기도
K-팝 아이돌들에게 매번 건네는 뻔한 질문이 있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하고 쉴 틈 없이 활동하는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열이면 열, 모두 ‘팬’이라고 답한다. “넘치는 사랑을 주시는 팬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의례적인 말 같지만 뼈저리게 맞는 말이다. 팬 없는 스타는 없다. K-팝의 눈부신 성공, 그 중심에는 K-팝 특유의 강력한 팬덤이 있다. K-팝 팬덤의 핵심은 ‘자발성’이다. 내 ‘최애’(최고로 좋아하는) 가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생일파티를 열고, ‘내 가수’의 음악이 차트 1위를 할 수 있게 24시간을 쪼개가면서 스트리밍을 돌리며 수십, 수백 장의 앨범을 산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으로 전 세계 곳곳에 현수막도 내건다. ‘팬덤의 탄생’ 현장을 다니며 만난 팬들은 하나같이 이처럼 말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내 새끼’, 나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성수연방에 방탄소년단 지민의 생일 기념 광고가 진행된 모습.
◇주인공 없는 생일파티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부근의 한 골목길. NCT의 멤버 도영의 사진이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크게 걸려 있다. 2월 1일인 그의 생일을 기념해 도영의 ‘생일카페’가 열린 것이다.
생일카페는 K-팝만의 독특한 팬 문화로, 팬이 카페를 대관해 멤버의 사진과 굿즈 등으로 꾸미고 다른 팬들에게 굿즈를 ‘나눔’한다. 아이돌 멤버의 생일을 기념해 열리지만 정작 주인공이 직접 오진 않는, 팬들만의 파티다. 서울에선 주로 홍익대 근처와 성수, 강남 등을 중심으로 열리며 서울 외 다른 지역에서도 수십∼수백 군데의 생일카페가 마련된다. 팬들은 하루에 몇 군데씩 생일카페 투어를 하는데, 이를 ‘순례’라 부른다.
생일카페를 주최하는 데엔 상당한 시간과 노력, 정성을 요한다. 행사 6개월 전부터 카페를 예약하는 것은 기본. 관건은 굿즈 제작이다. 멤버의 공식 사진부터 SNS에 올라오는 일상 사진, 아기 때 사진 등 다양한 사진으로 포토 카드와 컵 홀더 등을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다. 모든 게 준비되면 행사를 열기 전날 카페에 가서 몇 시간에 걸쳐 직접 카페를 꾸민다. 생일 카페를 찾아오는 팬들이 음료를 사 먹으면 그 수익은 카페 몫이기에 카페 주인들은 대체로 대관료를 받지 않는다. 그래도 생일카페 주최자는 굿즈 제작과 카페 꾸밈 비용으로 최소 100만 원 이상을 사용한다. 이날 만난 생일카페 주최자 김모(20) 양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모두 생일카페를 여는 데 사용했다고 했다. “모두가 같이 도영이의 생일을 축하하면 좋겠다는 마음 반, 도영이의 예쁘고 다양한 모습을 모두가 보면 좋겠다는 마음 반이에요. 도영이를 보면 정말 행복해요. 도영이가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면 좋겠어요. 그것뿐이에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방탄소년단 진의 생일 기념 광고가 걸린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국가대표광고 제공
◇24시간이 모자라…스밍 총공
“우리 할 수 있어요. 기 살려줍시다!” “1위 한 번 만들어 보자구요!” 최근 컴백한 보이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팬덤 ‘모아’가 모인 오픈 채팅방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열심히 ‘스밍’을 해서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곡을 각종 음원차트 상위권에 올리자는 각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인다.
‘스밍’은 스트리밍, ‘스밍 총공’은 스트리밍 총공격의 줄임말이다. 새로 나온 아이돌의 음원을 차트 상위권에 진입시키기 위해 팬들이 음악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것을 뜻한다. 채팅방, 트위터 등에는 ‘스밍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시물들이 즐비하다. 멜론, 지니, 벅스 등 음원차트 사이트마다 다른 스밍 방법을 공유하고 뮤직비디오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한 방법도 나눈다. 음악방송 1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음악 방송마다 순위 선정 반영 비율이 달라 이에 대한 안내도 다수 올라와 있다.
‘찐팬’에게 스밍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트위터에는 “스밍 인증을 해주신 분 중 5분을 추첨해 포토 카드를 드린다”며 스밍을 독려하는 글이 넘쳐난다. 보이그룹 비투비를 6년째 좋아하고 있다는 한 20대 팬은 “음원과 뮤직비디오가 공개되는 밤 12시를 기점으로 계속 스밍을 돌린다. 최소 공식 활동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밤낮없이 계속 스밍을 돌린다고 보면 된다. 스밍은 덕질의 기본이자 의무”라고 말했다. 그 원동력이 뭐냐는 물음에 그는 “보답”이라고 답했다. “제 최애 가수를 보면 마음이 행복해져요. 특히 비투비는 팬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보여요. 오빠들도 날 위해 이렇게 해주는데, 나도 오빠들을 위해 더 열심히 덕질해야지, 하는 마음이 큽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엑소 세훈의 사진으로 래핑된 티웨이 항공기의 모습.
◇‘내 가수 내가 홍보한다’…팬 크리에이터
아이돌 ‘덕질’의 단계를 굳이 따져본다면 콘텐츠 감상→콘텐츠 소비→응원·지지→콘텐츠 생산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단순히 콘텐츠를 감상하고 아이돌을 응원하다 ‘내 가수 많이 와서 보세요’라고 홍보 콘텐츠를 만드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유튜브 등에는 아이돌의 예쁜 부분, 재미있는 부분을 따로 편집한 영상들이 가득하다. 이러한 2차, 3차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을 ‘팬 크리에이터’라 부른다.
최근 만난 유명 팬 크리에이터 ‘보보싶’은 가수 보아의 팬으로, 보아 관련 영상을 만들어 올린다. 지난 2020년 보아의 데뷔 20주년을 맞아 만든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아가 직접 추천해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수준급의 영상편집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평범한 직장인인 그는 “저 덕분에 보아 팬이 됐다고 하는 분들을 만날 때 정말 뿌듯하다”고 말했다. “사실 무보수로 영상을 꾸준히 만든다는 게 굉장히 소모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인생의 반 넘게 가수 보아를 좋아하다 보니, 보아의 팬으로 활동하는 게 제 삶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 보아를 ‘덕질’해온 시간들이 제 삶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방법으로 보아라는 가수를 빛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낼 것입니다.”
◇전광판은 기본, 비행기까지 내 가수 얼굴로…‘팬 광고’
버스 정류장, 지하철역, 주요 사거리의 전광판까지.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라면 아이돌을 응원하는 ‘팬 광고’가 어김없이 있다. 생일 축하, 데뷔 기념일 축하, 콘서트 홍보 등 내용도 다양하다. 돈을 들여 아이돌 멤버 광고를 내거는 이들은 기획사가 아닌 팬들이다.
보이그룹 엑소 세훈의 비행기 래핑 광고, 방탄소년단(BTS) 정국의 광안대교 광고, 임영웅의 KTX 래핑 광고 등으로 화제를 모은 광고대행사 ‘국가대표광고’의 김현준 광고기획2팀장은 “월 10억 원의 매출 가운데 팬 광고가 30∼40% 정도를 차지한다.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할 때에도 팬 광고 의뢰는 꾸준했다. 팬 광고는 성수기, 비성수기도 따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에 걸쳐 저희와 팬들이 함께 논의해서 광고를 기획한다”며 “팬 광고의 특징이라 한다면 현수막 하나를 하더라도 어떤 재질의 천을 사용하고 어떤 색을 쓰는지 매우 세심하게 살핀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팬 광고와 기업 광고의 가장 큰 차이는, 홍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징성’이 중요합니다. 안 해봤던 것 위주로, 새로운 시도를 해서 화제를 모으고 해당 아이돌의 기를 살려주는 게 중요한 거죠.”
최초의 팬 광고는 JYJ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시청자가 직접 투표하는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흥행으로 투표를 호소하는 팬 광고가 유행하면서 더 탄력을 받았다. 한편 K-팝의 위상이 높아지며 이제는 단순한 지하철역, 버스정류장 광고가 아니라 비행기나 KTX를 래핑하는 등 스케일이 놀랄 정도로 커졌다. 지하철 광고의 경우 몇백만 원, KTX나 비행기 래핑 광고는 1억 원 넘는 비용이 든다. “팬분들은 성공적으로 광고를 마쳤을 때 더 크게 고마워하세요. 아이돌이 직접 광고를 인증해주는 경우엔 눈물까지 내비칠 정도죠. 사랑이에요. 사랑이 아니고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코어 팬덤’은 앨범 수십장씩 사… 올 K-팝 판매량 신기록 세울 듯
핵심은 ‘찐팬’이다. 다른 말로 하면 ‘코어 팬덤’(Core Fandom). 좋아하는 K-팝 아이돌을 위해 실제 소비를 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내는 이들 말이다. 실물 앨범 판매량과 공연 모객 수, 유튜브 조회수 및 구독수 등을 통해 팬덤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지만, 코어 팬덤의 경우 수백 장씩 실물 앨범을 복수 구매하는 경우도 있기에 정확한 가늠은 어렵다.
최근 IBK투자증권이 코어 팬덤의 규모를 추산한 결과를 내놓았다. 중복 구매가 적은 앨범별 구보 판매량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인데 하이브 160만 명, SM 76만 명, JYP 64만 명, YG 42만 명 등으로 엔터 4사(하이브, SM, JYP, YG)의 코어 팬덤 규모는 약 350만 명으로 추산됐다. 가장 많은 코어 팬덤을 가진 그룹은 방탄소년단(BTS)으로, 70만 명으로 파악됐다.
코어 팬덤의 경우 1명당 평균 7∼11장의 앨범을 사는 것으로 확인됐다. 앨범을 중복 구매하는 이유는, 앨범을 많이 살수록 팬미팅 등 오프라인 행사 응모권을 획득할 수 있고, 앨범마다 다른 멤버의 모습이 담긴 포토 카드를 수집할 수 있으며, 좋아하는 아이돌의 각종 차트 순위를 높일 수 있어서다. 또한 최근엔 새로운 앨범이 발매된 뒤 일주일간의 앨범 판매량, 즉 초동 기록이 팬덤의 지표로 여겨지면서 기록을 위해 앨범을 다수 구매한다. 이에 IBK투자증권은 올해 K-팝 실물 앨범 판매량이 지난해 8000만 장을 넘어 9100만 장 이상을 기록, 또 한 번 신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내다봤다. K-팝 인기와 세계적 팬덤의 규모로 볼 때 코어 팬덤 역시 확장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환욱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세계 10∼30대 인구수를 고려하면 코어 팬덤 규모의 절댓값이 매우 낮다”며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혜인 유안타증권 연구원도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동안 유입된 K-팝의 ‘라이트 유저’(light user)들이 조만간 ‘헤비 유저’(heavy user)로 전환되고 새로운 유입이 계속 생기면서 K-팝의 성장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QR코드를 찍으면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의 K-팝 아이돌 생일카페 취재 브이로그를 볼 수 있습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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