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일 기자의 인생풍경]가짜 탑과 진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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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2-0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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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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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의 원도심인 반죽동 대통사지 공원에 ‘가짜 탑’이 있습니다. 관광지도는 물론이고 다른 어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데, 주민들이 그린 투박한 공주 원도심 지도에서 그 이름을 보았습니다.

공주 사람들은 가짜 탑을 다 알고 있더군요.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을 절반쯤 크기로 조악하게 모사한 진짜 ‘가짜 탑’이었습니다. 얼핏 석탑처럼 보이는데 사출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이어서 속이 비어있습니다. 15년 전쯤 지역 불교 평신도회장을 지냈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간부급 공무원이 앞장서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민들은 이 탑을 ‘행사탑’이라고도 불렀는데, 축제나 행사 때면 탑을 트럭에 싣고 가서 현장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짐짓 진짜를 가장하지 않으니 정색하고 타박할 일은 아닙니다만, 백제 유적 도시 한복판에 가짜 탑을 세운 배경에는 문화재에 대한 부박한 의식이 스며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경우가 좀 다르긴 합니다만 전국 관광지에는 ‘스토리텔링’을 앞세운 조악한 가짜 명소가 즐비합니다.

전북 완주의 구이저수지 앞에 ‘사랑 이야기’란 제목의 팻말이 세워져 있습니다. 내용을 간추리면 ‘마주 보고 있는 경각산과 모악산이 결혼해 풍요의 상징으로 구이저수지 물이 넘쳐흐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근거도 자료도 없는 엉터리입니다. 결론은 그다음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해보세요. 그 사랑이 꼭 이루어진답니다.’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싶어 안달한다는 게 느껴집니다. 구이저수지를 끼고 걷는 둘레길 양쪽에 세워놓은 표지판은 더 기가 찹니다. 한쪽은 ‘경각길’인데 아들을 낳으려면 이 길로 가야 하고, 딸을 낳으려면 반대편 ‘모악길’로 가야 한답니다.

전국에 이런 곳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관광지마다 소원을 들어준다거나, 장수한다거나, 사랑이 이뤄진다는 스토리를 마구 끼워 넣습니다. 과거에는 ‘뭐 그렇다면…’하고 따랐다면, 요즘은 실소가 먼저 나옵니다. 동전을 던지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곳에서는 그렇게라도 관광객의 푼돈을 거두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부터 듭니다.

경북 영덕의 7번 국도변 바다 쪽으로 이어지는 이정표에 적어 놓은 이름이 ‘푸른 바다’입니다. 푸른 바다. 담박하면서도 서정적인 이름입니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관광지마다 덕지덕지 발라 놓은, 아무도 믿지 않는 소원 성취의 호객을 이제는 좀 지워버렸으면 합니다. 영덕의 이정표에서 그걸 지운 이름을 봅니다. 진짜 바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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