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괌 와서 슈퍼마켓사업 도와준 ‘혈육’… 은혜 못 잊어[사랑합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22년 10월 괌 망길라오CC에서 조카 박영님(오른쪽)과 포즈를 취한 필자. 필자 제공

■ 사랑합니다 - 조카 박영님

우리나라 거제도 면적과 비슷한 크기의 미국령 괌은 남태평양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괌은 1944년 창설된 미 앤더슨 공군기지가 있는 곳으로 한반도에 위급한 상황이 닥칠 경우 적을 바로 선제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나는 1977년에 괌에 이민 가서 지금까지 46년을 살았다.

그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괌에 이민 간다 하면 ‘괌이 어디냐’고 물을 정도로 괌은 생소한 곳이었다. 나 역시 미국 본토가 아닌 섬나라 괌으로 오라는 장인어른의 강요에 무척 망설였으나, 결국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 일본을 거쳐 괌으로 가는 팬암기에 몸을 실었다. 4시간 반을 날아가 도착한 8월의 괌은 마치 ‘땡벌’ 독침 같은 햇살로 첫인사를 건넸다. 적도가 가까운 천혜의 무공해 지역이라 햇볕이 유난히 따가웠다. 나는 여린 아내의 손을 잡고 부들거리는 속마음을 숨기며 괌 아가냐 공항을 빠져나왔다. 마중 나온 장인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파 아데이(Hafa Adai)”(괌 원주민 차모로족의 인사말)를 외치며 깊은 포옹으로 반기고 나는 팔려 온 송아지처럼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시작된 이민생활은 좀처럼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낯선 검은 피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걸어오고 배가 금방 터질 것 같은 뚱보들이 검은 입속으로 빅버거를 쑤셔 넣고 있었다. 나는 바닥을 쓸며 전쟁고아처럼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쓴 약 같은 침이 고였다. 한 해, 두 해 슬픈 시간이 반복되었다. 나는 그때마다 아내 몰래 조니 워커 한 병을 들고 아가냐 바닷가에 앉아 남진의 ‘울려고 내가 왔나’를 부르며 한국의 혈육을 그리워했다. 그때는 왜 그리도 부모 형제가 그리웠을까.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 지인이 생기고 말문이 조금씩 열리며 나만의 둥지가 만들어질 무렵, 지인의 소개로 슈퍼마켓을 하게 되었다.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은 기회였다. 이민 생활 5년 만의 일이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소한 일이었다. 살아야 했다. 아가냐 바닷가에서 ‘울려고 내가 왔나’를 그만 부르고 싶었다. 밤낮없이 뛰었다. 배달 가는 차에서 빵으로 때우는 끼니는 성공의 첫 페이지였다. 그때마다 하루가 바람처럼 지나가고 밤이면 달러를 세는 재미에 내 꿈은 적도의 구름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 무렵 동생이 새벽 가락시장에서 산 야채를 당일 비행기로 보내주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것은 놀라운 발상이었다. 될까하고 반신반의했던 일이 기적의 현실이 되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어제 새벽 서울 가락시장에서 산 파릇파릇한 상추, 깻잎, 고추를 오늘 적도의 땅 괌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생태, 갈치, 고등어까지 공수되어 아침 슈퍼마켓 오픈 전에 이미 교민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처음 슈퍼마켓을 시작할 때의 두려움은 이미 사라지고 이제는 일손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한국에서 조카를 데려왔다. 낯선 괌에 피붙이가 삼촌 하나밖에 없는 20대 중반의 조카는 오자마자 정신없이 바쁜 일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처음 내가 그랬듯 조카 역시 이민의 슬픈 눈물이 밥이었다. 그럴 때마다 달래기는커녕 “바쁜데 뭐 하냐. 그렇게 하려면 당장 나가라. 계집애가 맨날 우는 게 일이냐. 너 돈 벌러 왔지, 울려고 왔느냐”며 한순간도 참지 못하고 닦달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저녁 문 닫을 때까지 수천 가지의 잔소리가 삼촌과 조카의 관계를 끊어 놓았다.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선 조카는 지금도 내가 화를 내면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한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것이다. 잘살아 보자고, 삼촌과 함께 잘살아 보자고 데려온 조카다. 나는 이제 괌을 떠나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조카는 괌에서 조지 클루니를 닮은 멋진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두 아들의 엄마로 잘살고 있다. 요즘엔 골프에 빠져 이민 생활의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내가 받은 은혜보다 내가 준 은혜를 더 크게 생각하며 살았다. 그것은 곧 나의 소양 부족이리라. “영님아,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다음 달 괌에 들어가니 그때 CCP 바다로 벌렁거리는 가슴을 싹 날려 버리자.”

신사동에서 삼촌 김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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