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詩:選)]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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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5-24 11:35
업데이트 2023-05-2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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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일이 없어 나는 숨어듭니다 그러다 문득/ 왜 이리 쉬운 일이 없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못내 지나 끝내 넘어 달마처럼 동쪽으로 가고 또 가/ 한 줄 수평선에 엉망의 끝을 부려놓고 싶어집니다’

-정끝별 ‘강릉 점집’(시집 ‘모래는 뭐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되는, 공통의 장소가 있다. 유년의 옷장. 오직 아이만 들어가 앉을 수 있는 비좁고 포근한 곳. 무서우니까 문은 조금 열어두고 숨어 있을 수 있는 곳. 조마조마하면서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 속에서 아른대는 먼지의 수를 세다가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마는 경험이 내게도 있었다.

그 아득한 경험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늦잠 탓에 늦었고 덕분에 한적한 버스 안에서 나는 익숙한 졸음을, 어린 시절 옷장에서 느꼈던 바로 그 안온함을 느끼면서 한편으론 슬퍼진다. 이제 나는 옷장에 들어갈 수가 없다. 몸이 자라서만은 아니다. 이젠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구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별안간 깨닫고 만다. 마음의 피난처가 한 곳쯤 있으면 좋겠다. 집과 서점을 오가다가 불쑥 달아나듯 그곳으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이 힘들거나 어려울 적에 가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아버지는 생전에 버겁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고향 집 뒷산을 찾곤 했다고 하던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앙다물고 버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순리에 맡기고 나의 마음과 육신을 피난시킬 줄도 알아야겠지.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란 바로 그것이다. 내려놓고 잠시 물러나 보기. 숨어 있다가 돌아오기. 어린 시절의 옷장, 누군가의 고향, 어떤 이의 바다 같은 나의 피난처는 어디일 수 있을까. 몇몇 군데를 떠올려 본다. 그저 상상만으로도 다녀온 기분이 들고 조금 씩씩해지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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