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날들[유희경의 시:선(詩:選)]

  • 문화일보
  • 입력 2023-08-0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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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 유현아 ‘오늘의 달력’(시집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서너 해 전부터 일력이 유행이다. 예전 할머니·할아버지 댁에 걸려 있던 것처럼 커다랗지 않다. 오히려 손바닥만 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기 딱 좋은 크기다. 얼핏 보기에 귀엽고 재미난 듯하나, 이것 또한 낭비가 아닌가 싶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인기가 사그라들긴커녕 일종의 관례가 된 모양인지 올해는 여러 출판사가 일력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때마침 누가 선물을 해준 것도 있고 해서 올해는 나도 써볼까? 책상 위에 올려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 장씩 뜯어가는 즐거움이 꽤 쏠쏠했다. 나날을 확인하는 데에 쓸모가 있기도 했다. 그렇게 서너 달 열심히 뜯다가 잊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8월 초. 일력은 7월 중순에 머물러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혀를 차면서 지난날들 한꺼번에 떼어내고 보니 두께가 상당하다. 한 장 두 장은 가볍더니, 이 무게가 시간의 것인가. 하나씩 살펴보면 어떤 날은 큰비가 있었고 어떤 날은 친구와 술잔을 기울였고 어떤 날은 무미건조하게 보낸 아무 날이었고.

마음고생도 초조함도 즐거움과 기쁨도 한 장 몫이지만, 그것들 묶여 한 뭉텅이 나의 날들이 되었구나. 가볍고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고 두툼하고 무게가 나갈 수도 있다. 새삼스러움이 깨달음이 되려 하다 말다 오락가락한다. 시간의 의미를 알기에 여태 어리고 부족하다. 이것이 오늘 치의 앎. 조금 더 알려면 몇 장의 하루를 뜯어야 할까. 막막함과 기대 사이에서 오늘 치 일력을 미리 뜯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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