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기 좋은 계절[유희경의 시:선(詩:選)]

  • 문화일보
  • 입력 2023-10-1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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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볼펜으로/ 사랑을 적기 위해/ 한 점 붉디붉은 시의 응결을 찍기 위하여/ 오늘 밤 나는 다른 마음이 되고 싶다./ 좀 멀리 다른 데를 보고 싶다.’

- 이성부 ‘이 볼펜으로’ (시집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시 읽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시 쓰기를 권하곤 한다. 그런 제안을 하는 이가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한 평론가로부터 “시인들은 사람들이 시 쓰기를 참 바라는 모양”이라며, 자신은 “한 열 번쯤 권유를 받은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시인 입장에서 시인이 많아진다고 딱히 좋을 것도 없거니와, 그건 제안을 받는 쪽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제안을 받은 사람은, “실은 그래 볼까 생각 중이다”며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를 읽다 보면 쓰고 싶어진다. 보고 듣는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정의하고 싶어진다. 그와 같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어서 ‘인구의 절반은 상비 시인이다’, 라는 농담도 있다. 그러나 백지를 앞에 두고 볼펜을 쥐면 분명 아무것도 쓰이지 않을 것이다. 한껏 차오른 마음은 글자가 되지 않고 펜 끝을 맴돌 뿐이다. 성마른 사람은 당장 집어치우겠지만, 시 쓰기의 비결은 그때 그만두지 않는 데에 있다. 기분과 상념을 어떻게든 적어보려 할 때, 그때만은 시 쓰는 이, 시인이 된다. 스스로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오롯한 ‘자기 자신’이 되어 감을 느낄 수 있기에. 다른 마음, 다른 시선을 가지려 골몰하기에. 그러므로 시 쓰기란, ‘나’라는 감각을 되찾는 일이다.

온갖 조건과 관계에 얽매여 있는 사회적 개인으로부터 일탈하여 틀을 깨어낼 때의 기쁨과 홀가분함과 새롭게 다가서는 풍경과 형상들. 그런 것을 아는 이들의 이해와 사랑은 남다를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침 가을이다. 상념 깊고 쓸쓸하여 시 쓰기 참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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