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숨[유희경의 시:선(詩:選)]

  • 문화일보
  • 입력 2023-10-25 11:34
프린트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역에서 출발해 이미 여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기차가 출발하면 창문에 비친 얼굴들은 자기만의 생각과 잠에 빠져 희미해지고 기차는 계속해서 멀어지다 이제 하나의 점이 되어버렸는데 이게 다 소설 속 이야기는 아니었다.’

- 한여진 ‘소설처럼’(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조용하고 느린 말씨를 가진 남자였다. 충남 논산에 있는 한 기관에서 일한다는 그는 바쁘고 번거롭겠지만, 그곳 지역에 특강을 와주십사 부탁했다. 거절하지 못했다. 한 시절 우리 서점을 방문하던 단골이라 자신을 소개해서라거나, 지역엔 문화생활에 목마른 사람이 많다는 설득 때문만은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홀렸다고 해야겠다. 소개하고 설득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평온함이 있었다. 그가 궁금했다. 서울을 떠나 낙향하듯 옮겨 살고 있다는 내력 때문일까, 아니면 타고난 성품 탓일까. 복닥거리는 나의 삶과 견줘 보고도 싶었다. 흔쾌히 수락한 특강을 하러 가게 된 것은 가을이 완연해진 며칠 전. 입석과 대기표를 번갈아가며 어렵게 구한 기차에 몸을 싣고 그를 만나러 가는 길. 이른 아침 내린 비로 깨끗해진 하늘과 추수가 끝나 텅 빈 논이 이어지는 풍경을 보는데, 툭, 터지는 게 있었다. 나는 그것이 숨통이 아닌가 생각했다. 공주역에 닿아 그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까지 걸어가면서도 나는 새로운 숨을 만끽했다. 문득 평온함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 매복해 있던 숨이 아닐까. 자연의 풍광이,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다른 시공간에 있다는 감각이 다만 그것을 건드렸을 뿐. 한 걸음 한 걸음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내심 반갑고 흡족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잊고 지낸 나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시인·서점지기
주요뉴스
기사댓글
AD
count
AD
AD
AD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