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다가[유희경의 시:선(詩:選)]

  • 문화일보
  • 입력 2023-11-2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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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뜨거운 물을 끼얹으면/ 좋은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 사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기분인데/ 기분이 꼭 생각인 것만 같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분이 꼭/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생각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황유원 ‘눈사람 신비’(시집 ‘하얀 사슴 연못’)



겨울밤 뜨끈한 물로 하는 샤워. 비견할 즐거움이 또 있을까. 종종 샤워를 하는 도중, 머리를 감거나, 온몸에 비누칠을 하다 말고 문득, 겨울밤 샤워가 금지될 만한 극단적 상황을 상상하고 몸서리치곤 한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이 세계의 평화는 겨울밤 따끈한 샤워를 위해서라도 지켜져야 한다. 입을 앙다물기도 하는 것이다.

샤워기가 쏟아내는 온수 아래서 나는 온갖 상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과 그 일에서의 내 처신에 대한 자평이나 내일에 대한 다짐 같은 것이 거개를 이룬다. 새삼 떠오르는 지난 인연들의 안부를 궁금해하기도 한다. 잊었던 약속을 상기하거나, 상황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얻기도 하니 몸과 마음에 두루 좋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 어젯밤에는 불쑥, 이 얼마나 사치인가,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20∼30년 전만 해도 당연한 일상이었을 리 없다. 아니, 지금 당장 이와 같은 안락을 갈급해하는 가구가 있을 것이다. 이 나라뿐 아니라, 전쟁터가 되어버린 먼 나라에서도. 밀려드는 죄책감에 얼른 수도꼭지를 잠그게 되는 거였다.

고작 10여 분의 여유를 공평히 누리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려운 일인지. 과연 세상은 진일보하고 있는 것인가. 대체 국가란 무엇을 위해 있으며, 사람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숙고하게 되는 것이 그리 거창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겨울밤. 나는 나의 미력함을 절감하면서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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