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빈자리’ 채워주고 50년간 격려· 후원해준 ‘은인’[고맙습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재작년 고모님(오른쪽) 구순 잔치 때 함께 사진을 찍으며, 나는 그 은혜를 깊게 새겼다.

■ 고맙습니다 - 고모님 김정주

충북 괴산 추점리는 제가 태어난 고향마을입니다. 뒷산에는 왜가리 군락지가 있어 봄과 여름이면 산과 논, 하천 등이 그들의 놀이터였지요. 박달산 중턱에 단풍이 들면 들녘에는 누런 곡식이 일렁였습니다. 북서풍이 불고 눈발이 날리면 설국이 되었지요. 특히 분지형태이기 때문에 눈이 내리면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쯤 다니던 트럭도 볼 수 없었습니다. 박달산(해발 825m)의 웅장함과 어울린 주변의 풍경은 오히려 적막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1967년 3월에 장연면 오가리에 자리 잡은 장연초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추점리에서 오가리 십 리 길은 미루나무가 약 10m 간격으로 심어졌던 아름다운 신작로였지요. 이 미루나무 신작로 왕복 8㎞를 걷거나 달려서 통학했습니다. 1970년 음력 설날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골목 초입에서 누님을 만났었지요. “서울에 사시는 고모님이 너, 서울에 와서 학교 다니란다.” 질척이는 골목의 눈길을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서 집에 도착하니 안방에서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화롯불 주변에서 저의 전학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계셨습니다.

그해 초등 4학년이 되던 저는 서울로의 전학에 걱정과 기대로 고민했습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오지마을과 학교는 저의 전학에 관한 소문이 미담으로 퍼져갔지요. 고모님 노력으로 서울 숭인초로 신속히 전학이 결정되었습니다.

1970년 3월 25일 새벽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십 리 고갯길을 걸어 수안보에 도착했었지요. 부모님과 이별하고 할머님과 충주를 경유해 도착한 서울은 제가 생각했던 서울이 아니었지요. 고독했고 비정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서러움과 고난이 밀려 왔었지요.

그 무렵에는 방학이면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서 서울로 상경할 때는 이별의 아픔이 큰 고통이었지요.

1974년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어머니는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절망은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해 가을에 수학여행을 속리산 법주사로 갔는데 스님(중)이 되고 싶어 상담을 했을 정도였지요.

이때 절망감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고모님의 관심과 보살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고모님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의 부재는 더욱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었지만 세상을 원망도 했었지요.

중학 3학년 때부터 제 보물은 어머니의 영정사진이었습니다. 거처를 옮길 때마다 어머니 사진에 큰절을 했습니다. 사진에 인사를 하고 하루를 시작했고, 돌아와서는 하루의 삶을 보고했습니다.

소년기와 청년기의 떠돌이 삶에도 고모님은 어머니의 부재를 최소화시키는 분이었습니다. 이 무렵 가난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은 독서였습니다. 잠을 자는 것이 억울할 정도여서 눕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돈이 생기면 대부분을 책을 구입하는 데 사용했지요. 그럴 때마다 할머님과 고모님은 다양한 후원으로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청년기에는 독서와 국토답사를 병행하면서 필자의 삶만이 억울하고 슬픈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고모님의 관심과 배려로 삶의 태도가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했지요.

아름다운 우리 국토에 슬픔이 녹아 있다는 것과 고모님의 정성 어린 후원을 느낄 때면 그리운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끝없는 절망과 시련들은 오히려 고모님의 사랑으로 연단이 되었으며,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위한 열정으로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해마다 고모님의 부름으로 서울로 전학 가기 위해 십 리 고개를 넘던 1970년 3월 25일 새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덧 54년이 강물처럼 흘러갔습니다. 고개를 함께 넘었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작고하셨습니다. 이분들께 은혜를 보은할 방법이 없는 것이 답답합니다. “서울로 전학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면, 고모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눈시울이 붉어지곤 합니다.

금년에 고모님의 연세가 91세, 아직도 고모님께서는 저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빈번하시네요. 아! 세월은 참으로 빠릅니다. 어머님이 세상 떠나신 지 50년, 고모님께 격려와 후원을 받고 살아온 지 50년입니다. 고맙습니다. 고모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조카 김경식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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