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는 화장실, 알고 보면 문화적 편견과의 싸움터[북리뷰]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화장실은 가장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공간이다. ‘화장실 전쟁’은 미국 공중화장실 200년의 역사를 톺아보며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특권, 계급, 젠더, 불평등의 정치를 논한다. 사진은 국내 대학 최초로 성공회대에 설치된 ‘모두의 화장실’. 뉴시스

■ 화장실 전쟁
알렉산더 K.데이비스 지음│조고은 옮김│위즈덤하우스

美 공중화장실 200년 역사 분석
성별 구분 없던 빈민가 화장실
호텔·백화점 등에도 만들어지며
남녀 구분하고 계급적 분리까지

최근 성중립 화장실 도입 추세
공공장소 변화가 사회혁명 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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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문을 연 서울 삼청동 과학 책방 갈다의 화장실은 낯설었다. 남녀 구분 표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당황했으나 몇 차례 이용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어색해하는 손님도 드물었다. 그 무렵부터 주변 카페나 레스토랑에 성 중립 화장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성 소변기가 사라지고, 성별 구분 없는 화장실이 늘어났다. 대학에선 2022년 성공회대가 ‘모두의 화장실’을 채택했고, 카이스트가 뒤이었다.

공중화장실을 성별로 나누어 이용할 이유는 없다. 집에선 온 가족이 같은 화장실을 쓰지 않는가. 변기와 세면대만 있고 차례와 예절만 지키면 성별, 인종, 종교, 장애,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별 불편 없이 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성 중립 화장실의 일상화 과정은 미국에서도 쉽지 않았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둘러싼 문화 전쟁과 낡아빠진 법적, 제도적 관행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K. 데이비스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화장실 전쟁’에 따르면, 화장실은 문화 갈등의 피뢰침이자 정치적 포화의 집결지다. 누가, 어떤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지는 공공공간에서 한 사회가 어떤 몸, 정체성, 공동체를 환영하거나 배제하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까닭이다.

가령 공공공간에 장애인 화장실이 없다면, 그 사회는 장애인을 공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 셈이다. 또 성이나 인종에 따라 다른 화장실을 이용한다면, 그 사회가 성적 또는 인종적 차이를 자연스레 여긴다는 증거다. 화장실은 젠더, 인종, 계급 등을 둘러싼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그 사회적 의미가 생산되는 장소이다.

저자는 지난 200년 동안 미국 공중화장실의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화장실이 어떻게 젠더 질서를 형성하고, 인종, 장애, 계층 등에 따른 불평등을 강화했는지를 밝혀낸다. 공중화장실의 성별 분리는 보편적, 확정적이기보다 대도시 중상류층 문화에서 시작돼 사회 전체로 퍼져나간 잠정적, 일시적 현상이다. 사회적 논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화장실이 가능한 것이다.

공중화장실은 19세기 중반 도시 길모퉁이에 처음으로 설치됐다. 대도시 위생 문제, 즉 남성의 노상 방뇨를 막고, 취업 등 바깥 활동이 늘어난 여성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빈민 노동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이 화장실은 성별과 상관없이 세워졌다. 행인들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는 등 너무나 개방적이고 지나치게 더러워 여성은 물론 남성도 이용하기 싫어했을 뿐이다. 어쨌든 2차 대전 후까지 성별 구분 없는 화장실은 무척 흔했다.

성별 분리 화장실은 19세기 말 중상류층이 출입하던 호텔, 백화점 등 상업 및 여가 시설에서 출발했다. 남성 전용 화장실이 먼저 만들어졌고, 20세기 초 여성 사회 진출 증가에 따라 여성 화장실이 추가됐다. 이런 곳엔 노동계급이나 유색 인종은 출입할 수 없었기에, 공중화장실 건설엔 당대 지배 문화에 만연했던 성적, 계급적 분리가 철저하게 반영됐다.

이에 따라 직장,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성별 분리 화장실을 의무화하는 규제가 생겨났다. 이런 법안엔 남성을 공공공간에서도 자기 행동을 주체 못 하는 잠재 성범죄자로 보고, 여성을 보호 없이 신체적 안녕을 지킬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생각하는 편견이 담겨 있었다. 그나마 화장실 숫자도 크게 부족해 여성은 바깥에서 ‘내장의 평안’을 누리기 어려웠다. 화장실 부족은 여성을 가정에 묶어두는 흔한 차별 수단이었다. 1970년대까지 화장실이 없다면서 여성 고용을 거부하는 회사도 있었다. 성별 분리 화장실은 백인 남성 특권층 문화에 짙게 물들어 있었다.

1964년 민권 운동,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 등을 거치면서 화장실은 이러한 문화적 편견과 싸우는 전쟁터가 되었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여성 화장실 논란, 성소수자 권리 운동 등에 따라 성 중립 화장실이 다시 등장했다. 1980년대 이후 성폭력 증가, 동성애 조장 등 혐오와 배제의 목소리를 무찌르고 모두의 화장실은 도서관, 박물관, 식당, 시민센터 등에 속속 들어섰다. 2006년 컬럼비아특별구는 화장실에 성 중립 표지판 사용을 의무화했고, 2015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백악관에 성 중립 화장실을 도입했다.

저자에 따르면, 공공장소의 변화는 사회 혁명을 촉발하는 힘이 있다. 성별, 인종, 장애,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화장실은 차별을 억제하고 불평등을 낮추는 데 이바지한다. 저자가 화장실의 포용성과 공공성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이다. 388쪽, 2만1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