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시절 고단한 한국인 관광객에 준 무료 컵라면

  • 문화일보
  • 입력 2024-03-05 11:37
  • 업데이트 2024-03-0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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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5일 오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만난 우르스 케슬러 융프라우철도 사장은 직함을 떼고 추천한다면 ‘라우터브루넨의 블랙록 슬로프에서의 스키’가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라우터브루넨은 인터라켄에서 열차로 20분 거리의 산악 마을이다. 문호남 기자



■ 케슬러 스위스 융프라우철도 사장, 한국서 은퇴 인사

당시 위기처한 국가경제 감안
한국서 철도 티켓 사면 공짜
한국인에 티켓값도 할인해줘

韓여행업계 250명 워크숍 참석
헌정 영상·기립박수로 은퇴축하


우르스 케슬러(62) 스위스 융프라우철도 사장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융프라우철도 & 지역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한국인들에게 감사와 함께 은퇴 인사를 전했다. 이날 워크숍에 참가한 250여 명의 한국 여행업계 관계자들은 케슬러 사장에게 헌정 영상과 감사 편지 등을 전달하고 기립박수로 은퇴를 축하했다. 케슬러 사장의 마지막 마케팅투어에서 고별 은퇴식이 한국에서 성황리에 열린 셈인데, 외국 관광기업의 CEO에 대한 이 정도의 예우와 대접은 관광업계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날 참가자 대부분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인사를 보냈다. 케슬러 사장이 ‘신발이 닳도록’ 한국을 드나들면서, 맺은 인연의 힘이었다.

케슬러 사장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51번째. 1987년 융프라우철도에 입사해 줄곧 마케팅과 서비스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1988년 한국을 처음 찾았다. 2008년 사장 자리에 오른 뒤에는 코로나19로 국경이 닫힌 시기를 제외하고는 매년 한국을 방문했다.

스위스 융프라우를 가본 한국인 관광객이라면, 케슬러 사장은 몰라도 만년설과 빙하를 감상하면서 먹었던 컵라면의 얼큰한 맛을 기억한다. 융프라우요흐 라운지에서는 한국에서 철도 티켓을 구입한 한국인에게 컵라면을 무료로 제공한다. 컵라면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8.2스위스프랑(약 1만2300원)을 받고 판다.

융프라우철도가 한국인에게만 컵라면을 제공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컵라면을 제공하기 시작한 건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국가경제 전반이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최악의 환율 급등으로 해외여행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건 당연한 일. 당시 융프라우철도의 한국총판 동신항운의 송진 이사는 융프라우철도 측에 읍소했다. 160스위스프랑이던 융프라우철도 티켓 가격을 한국인에게만 깎아달라. 당시 마케팅 담당이었던 케슬러 사장은 한국인에게만 티켓값을 100스위스프랑 아래로 내리는 결단을 했다. 한국인 관광객에게 컵라면을 주자는 제안까지 흔쾌히 수용했다.

당시 융프라우요흐에서의 컵라면은, 단순한 컵라면 이상의 위안이었다. IMF의 와중에 떠나온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에게도, 해외 한식당이 흔치 않던 시절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던 여행자들에게도 고마운 선물이었다. 당시를 회고하던 케슬러 사장은 “마케팅의 관계는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게 기본”이라며 “신뢰는 어려운 상대를 돕는 과정에서 쌓인다”고 했다. 그는 “전 지구적 재앙이었던 코로나19 위기도 그렇게 극복한 게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케슬러 사장은 은퇴를 앞둔 마지막 한국 방문 마케팅 투어에서 참가자들이 보내준 축하인사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행사에서 마지막 인사를 전하면서 몇 번이고 목이 멨다. 궁금한 건 은퇴 이후의 계획이었는데, 그는 “바빠서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대신 그에게 한국 관광객들을 위한 여행의 조언을 부탁했다. “융프라우처럼 먼 곳까지 여행하게 된다면 오래 머물면서 여러 곳을 샅샅이 봐주세요. 바쁜 여행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경관과 즐거움이 거기 있습니다.”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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