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온 20세기>(32)평양-베를린 진주 소련의 만행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폐허로 변한 베를린

사람이 얼마나 말의 포로가 되고 있는지…. 인간이 발명한 언어에 인간 스스로가 呪縛(주박)되어 꼼짝 못하곤 하는 수가 있다. 한낱 ‘말’에 불과한 것을 마치 ‘실물’ 그 자체인 것처럼 迷信(미신)하고, 그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이 소름끼치는 비극과 참극을 우리들의 문명한 20세기에도 빚어 왔다.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 따로 한 장을 적어 보아야 될 것이다.

‘언어’를 ‘실체’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언어의 呪物崇拜(주물숭배·fetishism)이다. 우리들에게는 수많은 말들이 그러한 주물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예컨대 ‘좌익’과 ‘우익’이란 말이 그러한 경우의 하나다. 해방 후 남한에서 좌우가 대립하고, 특히 1945년 말 모스크바 三相(삼상·미·영·소 3국의 외무장관)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이 발표된 뒤 그에 대한 찬반의 입장으로 좌우가 격돌하면서 ‘좌익’과 ‘우익’이란 말은 마치 인격을 갖춘 실체처럼 착각되어 웃기는 일도 많이 일어났다.

우익의 입장에서는 우선 ‘좌우’라는 말의 차례부터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우익에서는 ‘우좌’라고 하는, 아무래도 눈에 선 어색한 말투가 등장했다. 그에 질세라 좌익에서는 ‘미·소 공동위원회’ 대신 ‘소·미 공동위원회’라고 들고 나왔다. 지구의 네 方位(방위)를 가리키는 말의 순서가 동양어권에서는 ‘동서’요 ‘남북’이지만, 서양어권에서는 ‘동서’에 ‘북남’이 관례이다. 서양 사람들이 ‘North and South Korea(북·남한)’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우리가 남북한, 남북문제 하는 것도 정치·이념과는 아무 상관없는 자연스런 언어 관행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굳이 ‘북남간’ ‘북남문제’라고 우기고 있다. 역시 언어의 주물숭배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좌우란 말과 얽혀서 또한 생각나는 게 있다. 일제시대에는 거리에 나가면 좌측 통행이었다. 전세계에서 오직 일본과 영국만은 지금도 자동차의 핸들이 오른쪽에 붙어 있어 차가 좌측통행을 하고 있다. 해방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그 많은 각종 차량들도 같이 들여왔다. 미국 차는 지금의 우리나라 자동차처럼 핸들이 왼쪽에 붙어 있어 길의 우측을 달린다. 물론 해방 직후의 우리 나라에는 서울이건 시골이건 자동차다운 자동차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미군정의 지시로 차량의 우측통행제가 실시되었을 때, 해방공간에서 바퀴달린 차량이 있었다고 한다면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소나 말이 끌고 가던 달구지가 고작이었다.

사람은 계속 좌측통행이었다. 그걸 빗대어 좌익에서는 ‘牛馬(우마)는 우익으로, 인간은 좌익으로!’라는 표어를 만들어 거리에 내붙이기도 했던 생각이 난다.

해방 후 남한에서 좌익이 공세에 있었고 우익이 수세에 몰려 있던 데에는 여러 가지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남한은 좌익이 아무리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필경 우익의 것이고, 우익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남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그 책임이 우익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 대신 북한은 좌익의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좌익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좌익에 책임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방 후 남북한의 사정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다를 수도 없었다. 가난과 궁핍, 혼란과 무질서가 어디서나 지배하고 있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35년 동안 강점·통치하면서 언제 우리가 해방이 되더라도 식량과 물자가 넉넉히 비축되어 있고 치안과 질서과 확보될 수 있도록 이 땅에 善政(선정)을 베풀어주고 간 것은 아니다. 구한말 세도정치의 苛斂誅求(가렴주구)로 지쳐 쓰러진 땅, 그걸 일제가 낚아채서 다시 체계적으로, 파상적으로, 심층적으로 착취해 간 땅, 거기에다 중·일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까지를 일제의 식민지로서 치르고 난 땅, 그것이 해방 후의 한반도의 실정이었다. 남북한에 그래도 해방 당시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면, 일제의 지배의도에 따라 남한은 쌀의 공급기지로 농업이 나았고 북한은 그에 비해 공장시설을 더러 해 놓아서 공업이 나았다는 점 정도였다.

남한의 좌익과 좌익 동조자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했던 상황은 해방 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서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의 분계선 38도선이 이내 남북한을 차단하는 엄격한 경계선이 되어 사람들이 쉬이 넘나들 수 없는 準(준)국경선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로 해서 좌익이 책임져야 할 북한의 사정을 남한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우익이 책임져야 할 남한의 사정은 남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 남한의 사정이란, 아무리 좋게 보아 주려 해도 좋았다고 할 수 없는 꼴불견이었던 것이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선 북한의 사정도 남한에서 알 수 있어야 했다.그래서 양쪽을 견주어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북쪽을 가보지 않았다고 해도 당시 남북간의 경제·사회적 형편은 대동소이했으리라는 것이 건전한 판단이라 믿는다.

확실하게 다른 것이 있다면 남한에서는 좌익세력이 허용되었고 상당한 수준의 언론자유를 누리면서 극우에서 극좌까지 다양한 색채의 신문잡지가 나오고 있었으나 북한에서는 우익세력이 허용되지 않았고, 소련군정을 비판·공격하는 언론의 자유도, 언론매체도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남한은 잘 알려진 ‘현실’이었다. 북한은 베일에 가린, 알려지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非(비)현실’이었다. 남한의 미군정은 비판·비난의 대상이 된 ‘현실’이요, 북한의 소련군정은 상상·동경의 ‘비현실’이었다. 우익에는 책임져야할 남한의 현실이 있었고, 좌익에는 책임질 필요가 없는 북한의 ‘비현실’이 있었다. 현실에 없는 것은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의 비현실은 상상·동경 속에서 미화되고도 있었다. 그래서 좌우의 대국에서 출발부터 불리했던 남한의 우익을 위해서는 좌익이 책임져야 할 북한의 ‘현실’이 알려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한의 현실을 보고 온 사람들의 보도가 있어야 되었다. 그 사람들의 언론이 있어야 되었다.

이북에서 월남한 李北(이북)이란 사람이 그무렵 ‘以北通信(이북통신)’이란 잡지를 냈다. 나도 중학교때 ‘이북통신’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재미있게 보았다는 까닭은 어느 시대나 그런 것처럼 사춘기의 젊은이들에게 수요는 컸으나 그 당시엔 공급이 거의 고갈상태였던 포르노 ‘문헌’을 ‘이북통신’이 우리들을 위해서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같으면 불량(?)청소년들이 음란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그 당시 우리들은 ‘이북통신’에서 소련군의 북한 부녀자에 대한 강간·윤간 기사며 심지어 소련 여자 군인들에게 붙들려 하늘이 노래지도록 집단적인 ‘사랑’을 받고 살아나온 어느 북한 장정 등의 얘기를 읽으면서 代用(대용)포르노 문건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렇게 재미로 읽고 나선 물론 그것은 소설보다도 허구의 얘기라 생각하고 그 사실을 믿지는 않았다. 사람의 귀가 알아들을수 있는 소리의 작기와 크기에 다같이 한계가 있는 것처럼, 사람의 인식이 수용할수 있는 진실의 크기에도 상한선·하한선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북통신’에 실린 북한의 현실에 대한 기사가 허위·날조가 아니라 충분히 있을 수 있었고 실제로 있었던 진실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15년뒤의 일이다.

독일 유학 시절 하이델베르크에 살다가 베를린으로 이사와서 보니 어쩐지 사람들의 눈빛이, 특히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부인들의 눈빛이 서독에서 흔히 보던 아줌마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대도시에 이주해 온 시골뜨기의 과민해진 신경 때문이었을까.

그런 인상을 얼마 있다가 친한 독일 친구에게 토로했더니, 그건 네 말이 맞다는 것이었다. 베를린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누구나 다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 얘기를 듣고 나는 헌 책방에서 1945년부터 1953년까지의 베를린 얘기를 쓴 쿠르트 리스(Kurt Ries)의 르포르타주 ‘베를린 베를린’을 구해 읽어 보았다. 쿠르트 리스는 세계 10여개국어로 번역된 ‘요제프 괴벨스(Joseph Go¨bbels)평전으로 널리 알려진 스위스의 평론가로, 그가 쓴 베를린 필 하모니의 전설적인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평전 ‘정치와 음악’은 우리나라에서도 읽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리스의 ‘베를린 베를린’은 무대만 북한을 동독으로 바꾸고 표현의 언어만 점잖은 것이 차이가 있을 뿐 그 내용은 ‘이북통신’과 흡사했다.

이른바 ‘데몽타주’-소련군이 들어오자 동독에서건 북한에서건 공장들은 닥치는 대로 해체(데몽타주)되어 소련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밤에는(처음에는 낮에도) 집집마다 소련군이 찾아와 여자 사냥이 시작되었다. 노소·미추를 가리지 않았고, 누가 보고 있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딸 앞에서 엄마를, 엄마 앞에서 딸을, 심지어 임신한 여성을 겁탈했다.

베를린 여성들은 은신처를 찾아 숨어다녔고, 얼굴은 되도록 밉고 늙게 보이도록 숯으로, 재로 ‘화장’을 했다. 더러는 머리를 깎고 남자로 변장하기도 했다.

시계란 시계는 회중시계건 손목시계건 닥치는 대로 빼앗겼다. 자전거도 눈에 띄면 ‘붉은 군대’의 것이 되었다. 어떤 베를린 사람은 그가 입은 외투가 위대한 ‘붉은 군대’의 외투보다 좋아 보였는지 길거리에서 “벗으라”해서 빼앗겼다. 그래도 그 소련군인은 다른 병사들과는 달라 염치가 좀 있었던 듯싶다. 자기가 입고 있던 외투를 “입으라”고 와서 벗어 주었는데 집에서 벗어 보니 호주머니 속에서 열여섯 개의 시계가 쏟아져 나왔다던가….베를린에서, 동독 지역에서 소련군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스탈린도 모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동베를린의 소련 군정 당국에서 발행했던 기관지 ‘태크리테 룬트샤우’지에는 “붉은 군대 용사들에게 그처럼 많은 선물을 해준 베를린 시민들의 후의에 충심으로 감사드린다”는 스탈린의 메시지가 얼마 후에 게재되었다는 것이다. 쿠르트 리스는 소련군 진주 후의 베를린 광경을 묘사하면서 “한 도시가 겁탈을 당했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해방 직후 소련군 주둔하의 이북 사정에 대해서 ‘이북통신’보다는 좀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좀더 점잖은 언어로 좀더 냉철하게 북한의 현실을 알려 준, 신뢰할 만한 미디어나 문헌이 없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 생각된다.

좌익에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던 우익을 위해서보다도, 북한은 보지 못하고 남한의 현실만 일방적으로 보면서 좌익이 되었거나 좌익에 동조한 사람들을 위해 불행한 일이었다 생각된다. <최정호. 연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