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초월한 단결의 현장’ 우리 옛 성 17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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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 / 이덕일, 김병기 지음 / 예스위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저자가 2년여 동안 매월 한 차례씩 다녀온 산성 답사의 기록을 모아 묶었다. 연구소는 줄잡아 1200여 개가 넘는다는 남한 땅의 산성 중에서 굵은 역사의 시간이 지나간 곳이나 빼어난 경관을 품은 곳을 가려 뽑아 다녀왔고, 고구려의 옛 성이 남아있는 중국의 만주, 길림성 일대와 백제 유민들이 건너가 쌓은 조선식 성이 있는 일본의 지역까지 두루 살폈다. 책은 그 답사의 여정을 꼼꼼히 담아낸 기록이다.

옛 사람들에게 산성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저자는 우리의 산성을 두고 ‘지배층이나 비지배층의 모든 백성들이 들어가 일치단결해 싸우던 공생공사(共生共死)의 현장’이었다고 강조한다. 지배층을 위한 공간인 중국이나 일본의 성과는 사뭇 다른 의미라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평지의 성과 산성을 함께 세웠다. 백성들은 평상시에 마을의 평지에 쌓은 성 안에서 생활하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배후에 지어놓은 산성으로 모두 들어가 결사항전을 하는 식으로 성을 활용했다. 산성이야말로 계급에 상관없이 온 백성이 한 몸이 돼서 적과 맞섰던 전선이자 비장감 넘치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되돌아보는 산성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저자는 산성이 ‘방치된 역사’라고 단언한다. 더러 복원이 되고는 있지만 그의 말대로 흙으로 지은 성은 유실돼 자취만 희미하고, 석성은 무너지고 흘러내려 뒹굴고 있다.

저자는 평지의 자그마한 유적들은 죄다 확대돼 관광상품이 되고 있지만,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산성은 그저 방치된 채 무너져가고 있다며 안타까워 한다. 폐허가 돼가고 있는 산성에서는 상처난 역사와 함께 선조들의 호방한 기상과 역사의 숨결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게 답사 여행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장이다. 게다가 붐을 이루는 걷기 여행의 목적지로도 훌륭하고, 여기에 ‘정신적 의미’까지 더할 수 있는 게 산성답사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부터 부산의 금정산성, 창녕의 화왕산성 등 17개 산성과 함께 크고 작은 성들이 지나온 시간들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이들 산성이 역사의 분수령을 이뤘던 장면들을 복원해낸다. 예컨대 남한산성의 답사기에서는 산성 축성 당시의 뒷이야기부터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에 항복하는 치욕의 순간, 그리고 당시의 국제정세 등을 두루 되짚는다.

답사 기록은 산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죽주산성에서는 몽골침략에 맞선 고려의 시간부터 임진왜란 당시 격전에 이르기까지 산성의 내력을 다 훑고는 오지랖 넓게 안성 땅으로 내려선다. 안성으로 이어진 답사기는 일대의 미륵불을 다 돌아보고 칠장사, 청룡사 등의 절집을 거쳐서 궁예와 바우덕이 이야기까지 두루 짚는다. 책상머리에서 산성의 역사를 하나하나 짚어 읽는 맛도 괜찮겠지만, 저자의 동선을 따라 씌어진 책은 산성답사의 실전에서 가장 값 있게 활용할 수 있겠다.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