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위기에 강했던 朴대통령

허 민/정치부장

지난 25일 오전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은 다소 거창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돼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렸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시신 확인 결과를 발표하면서 “과학자의 자존심을 건 조사 결과를 믿어 달라”고 당부하는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하지만 발표가 끝난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발표가 조작됐다’는 주장이 SNS상에서 유포되기 시작했다. 응답자 절반 이상이 국과수 발표를 믿지 못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조사에 따르면 ‘국과수 발표를 신뢰하지 못 한다’는 응답이 57.7%나 됐다. ‘신뢰한다’는 24.3%에 그쳤다.

정치인의 말도 아니고, 과학자의 객관적 조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은 이젠 정부의 누가 뭐라고 해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시대’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불신의 이유는 도처에 있다. 세월호 참사 후 드러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관피아(관료+마피아)의 폐해, 검찰과 경찰의 엉터리 수사, 계속된 인사 참사와 여야 정치권의 정파적 행태 등이 그 이유에 속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방위적인 불신 사태의 정점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이다. 폐일언(蔽一言)하면, 전사회적 불신이 만연한 것은 박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한 데서 비롯됐다.

박 대통령은 원래 뼛속에 위기관리 의식이 DNA처럼 박혀 있는 인물이다. 1979년 10월 26일 밤, 27세의 그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심야에 깨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자 바로 “휴전선은 어때요”라고 전방 상황을 걱정했다. 2006년 5월 지방선거 당시 유세 도중 테러를 당해 수술을 받은 직후엔 “대전은요”라고 말했던 그였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특유의 감각으로 판단하고 기민하게 대응해 상황을 통제했던 위기관리 능력은 그의 특장이었다. 이는 2012년 대선 시기에 ‘여성 리더십은 시기상조’라며 알통과 근육만 믿고 떠드는 반대쪽 마초들의 공격을 제압하는 무기가 돼 주었다.

하지만 집권 후 그게 사라졌다. 무엇보다 잇단 인사 참사와 거기서 비롯된 국정 파행의 대처 능력이 발휘되질 않고 있다.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갖고 강력한 경제회생 드라이브를 걸었어야 할 집권 1·2년차의 내각 출범이 지연됐지만 돌파 방안은 내놓질 못했다.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이 줄줄이 낙마하고 국무위원 곳곳이 구멍 난 채 내각이 굴러가는 데도 근본적인 처방은 보이질 않는다. 위기관리의 부재는 세월호 참사 대응 과정에서 정점을 찍었다. 한국경제가 위기 극복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횡행한다. 한 중진 친박계 정치인은 사석에서 “이런 식으로라면 권불십년(權不十年)이 아니라 권불삼년(三年)이 될지 모른다”며 조기 레임덕 상황을 우려했다.

청와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는 박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마음에 여유로움이 찾아들지 않는다. 힘들고 길었던 시간들…휴가 기간 동안 남아 있는 많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박 대통령이 휴가 중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전방위적으로 엄습한 대한민국의 총체적 위기를 직시하고, 자신의 특장이었던 위기관리 능력을 다시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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