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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오승훈 부국장 겸 경제산업부장 게재 일자 : 2017년 03월 22일(水)
‘영혼 없는 철밥통’ 만드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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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훈 경제산업부장

“공무원은 영혼이 없습니까?” 대놓고 물었다. 지난 2008년 이명박정부 출범을 앞두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업무보고 과정에서 한 공직자가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말한 게 한동안 회자되던 터였다. 백발이 성성한 40년 관록의 원로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영혼이 없으면 공무원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정색하고 나무랐다. 진념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얘기다. “공직에 있는 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단임제 정부가 몇 번 바뀌면서 ‘한번 차를 타지 못하면 밀려난다’며 공직자 의식이 흐릿해졌지만, 대통령과 여당의 요구도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선비정신을 가져야 한다.”

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공복(公僕)으로 처신하라는 것인데, 아쉽게도 그의 주문은 지금에도 희망 사항인 것 같다. ‘청와대 뜻’ 한마디에 실행에 나섰다가 국정농단이 벌어진 사태만이 아니다. 요즘 세종시에서 전해오는 관가의 풍경도 그러하다. 5·9 대선을 앞두고 대선 주자 진영에 줄을 대려 애쓰는 볼썽사나운 고위공직자가 한둘이 아니다. 인수위 없이 새 정부가 출범하는 까닭에 부처마다 첫 시연장인 업무보고를 준비하려 물밑에서 부산하다. 공약을 탐문하고, 일부 부처는 전담팀도 꾸렸다.(문화일보 3월 21일자 16면 참조) 새 리더십의 취향과 입맛에 맞는 정책을 내놓으려는 것이다. 현실성 없는 공약이나 구호라도 바람직한 정책 상품으로 포장해내야 한다. 한참 진행돼오던 사업도 정상적으로 진행을 결정하기보다는, 유력시되는 차기 정권의 색깔을 살펴 ‘보류’로 분류하는 융통성도 보인다. 그게 고위직으로 가는 길이고 출세의 잣대다. 정치권력과 연줄이 닿거나 맞춤을 해야 승진이든 전보든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인사 구조 탓이다. 그런 눈치는 없지만 반듯한 영혼이 있는 공직자는 외곽을 돌다 물러나게 된다.

그뿐 아니다. 경제부처건 사회부처건 새 정부의 정부조직 개편을 겨냥해 ‘작업’을 벌이고 있단다. 새 정부가 옛 정부와 차별화하려 조직을 뗐다 붙였다 하고 이름을 바꾸는 게 관행이 돼버린 분위기 속에, 조직 보호를 명분으로 방어기제가 발동하고 있다. 저마다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도록 ‘영역 표시’를 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일종의 선제 대응으로 내부 조직 신설과 인력 증원이 진행돼왔다. 올해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중앙부처 내 신설 조직만 30개에 달한다고 한다. 시급한 행정 수요에 대응하려는 것이라는데, 새 정부가 출범해도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정권 교체기의 이런 행태는 이제 공무원의 생존 본능처럼 됐다. 이런 ‘코드 맞추기’ 본능을 키운 건 정치권력이다. 대선 주자마다 공직사회를 향해 불만스러운 정책 사안에 대해선 “손도 대지 마라”고 으름장을 놓거나, 환심을 사려는 선심 공약을 쏟아낸다. 시간에 쫓겨 검증도 어려운 이번에는 더하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대선 주자들은 지난 18일 공무원노조를 찾아가 교사들을 포함해 공무원들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공무원노조의 11대 추진 과제도 다 수용하겠다고 했다. 공공부문 성과연봉제와 성과평가제 폐지도 들어 있다. 그러면서 “정권 교체에 함께해 달라”고 유혹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헌법에 위배될 가능성은 차치하고, 힘겹게 한두 걸음 전진한 공공부문 개혁마저 원점으로 돌아갈 분위기다. 노무현정부 시절 그렇게 앞장서서 외쳐댔던 ‘정부 혁신’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김태유 서울대 교수는 저서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에서 “정부 개혁이 자체적으로 달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공무원이 자발적으로 수술대에 올라가 악성 종양을 직접 잘라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수술의 대상과 주체가 같으니 개혁이 가능하겠느냐는 말이다. 이젠 정치권력까지 역주행을 부추기니 공직사회 변화는 더욱 난망한 일이 됐다. ‘영혼’까지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정책 오류를 당당히 시인하거나 일관성을 굽히지 않는 소신에 대한 기대도 접었다. 권위주의와 무사안일·복지부동을 걷어내는 데 도무지 방법이 없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해바라기로 변신하는 능력이나 눈치가 없어도 차라리 맡은 일이나 잘하는 게 낫지 않은가. 어느 쪽이든 이것만은 분명하다. 공직사회 개혁을 미루는 정권은 ‘유능한 공복’이 아닌 ‘무능한 철밥통’만 양산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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