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창작세계, 책상을 통해 훔쳐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E B 화이트의 소박한 오두막 책상(왼쪽 사진)과 커트 보니것의 유쾌하고 자유로운 창작공간(오른쪽)은 모두 두 작가의 작품과 닮았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 작가의 책상 / 질 크레멘츠 사진, 존 업다이크 외 글, 박현찬 옮김 / 위즈덤 하우스

유명 초상사진작가 ‘질 크레멘츠’
스티븐 킹 등 56人의 책상 촬영

E B 화이트,타자기 한 대만 놔둬
커트 보니것,큰 사전 받치고 작업
존 업다이크,재질다른책상 3개 써

‘작가에게 책상’은 단순한 ‘가구’일 수 없다. 이디스 훠턴이나 마르셀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은 침대 위에서 글을 쓰곤 했다지만 대부분의 작가에게 책상은 매일 매일 글쓰기라는 특별한 노동을 이어가는 축약된 창작의 공간이자 그 시간들이 쌓인 기억의 장소다. 컴퓨터, 필기도구, 원고 뭉치, 책들 그리고 다양한 물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펼쳐져 있는 책상은 누구도 훔쳐 볼 수 없는 작가의 머릿속 풍경과 가장 닮은 물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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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위대한 초상 사진 작가인 질 크레멘츠(78)의 사진집 ‘작가의 책상’은 이 같은 작가의 책상을 담고 있다. 존 업다이크, 존 어빙, 파블로 네루다, 필립 로스, 조이스 캐럴 오츠, 스티븐 킹, 토니 모리슨, 에이미 탄, 수전 손태그 등 한 자리에 모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위대한 작가 56명의 책상이다. 1996년에 나온 책이기에 1970년부터 그즈음까지 활동한 주요 작가들의 책상이 주인공인데 크레멘츠의 사진에 포착된 책상들은 작가의 개성만큼, 그들의 작품만큼 다를 수밖에 없다. 책상, 책상과 마주한 작가의 모습은 그의 작품, 작업의 규칙과 습관들을 상상하게 한다. 사진 옆에는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 스타일에 대해 쓴 글이 나란히 수록돼 있다. 작가의 책상, 책상과 마주한 작가의 모습을 보며 그의 글쓰기 철학과 세세한 글쓰기 습관을 읽어가는 즐거움이 크다.

가장 인상적인 책상은 ‘샬롯의 거미줄’의 작가 E B 화이트의 소박한 책상이다. 호수가 보이는 큰 창 앞, 전동 타자기 한 대만 놓인 작은 책상. 자연과 소박한 사람들, 생명들을 담았던 그의 작품과 닮았다. 스티븐 킹도 상업적 성공에 비해 턱없이 비좁은 공간을 반려견과 함께 사용하는데, 그의 책상은 두 발을 겨우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만 비어있다. 존 업다이크는 서로 다른 재질의 책상을 세 개 쓴다. 오크 책상에서는 편지를 쓰고 전화 통화를 하고, 퇴역 군인이 썼던 녹색 철제 책상에선 소설 도입부나 시를 쓴다. 베니어판에 흰색 포마이카를 입힌 세 번째 책상 위에선 워드 프로세서로 거의 모든 글을 쓴다고 했다. 수전 손태그의 길고 널찍한 책상에는 다이얼 전화기, ‘뉴욕 리뷰’, 책과 종이 뭉치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존 치버의 작은 책상 위에는 담배 두 갑과 꽁초 가득한 재떨이와 술잔이 놓여 있다. 맨발에 느슨한 실내복 차림인 커트 보니것은 좁고 낮은 선반 위에 타자기를 두고 큼직한 사전을 무릎에 받쳐 책상으로 쓰고 있다. 커트 보니것의 사진이 유난히 편안해 보이는 것은 크레멘츠가 그의 아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책상처럼 작업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스티븐 킹은 중요한 작업은 오전에 세 시간쯤 집중해서 하고 오후엔 소설이 되지 않지만 작업하기에 재미있는 스토리를 갖고 논다고 했다. 반면 존 어빙은 좀처럼 자신을 쉬게 내버려 두지 않고 계속 일을 한다고 했다. 캐서린 앤 포터는 언제나 마지막 한 줄, 마지막 단락,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글을 진행한다. 작가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치르는 작은 의식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토니 모리슨은 동트기 전 어둑어둑한 새벽에 홀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것이 그 의식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제각각의 풍경에도 공통점은 있다. 치열함, 성실함 같은 것들. 서문을 쓴 존 업다이크는 작가의 책상에서 공통적으로 평화로움을 봤다. “인물의 배경과 자세는 제각각이지만 사진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평화로워 보인다. 결국 글쓰기란 속 깊은 위로이자 생각의 정리이며, 동시에 영혼을 정화하는 행위다. 그렇기에 책상 구석구석 그 모든 작업 공간에 행복이 스며 있다.”

책에 수록된 사진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에 찍은 작품들로 책상 위에는 구식 올리베티 수동 타자기, 전동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초기 탁상 컴퓨터, 랩톱, 심지어 구술 전용 녹음기 등이 놓여 있다. 흥미로운 글쓰기 변천사이기도 하다. 144쪽, 1만68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