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범죄 가해자엔 관대, 피해자엔 엄격한 잣대’ 관행에 제동

- 대법 ‘性인지 감수성’제시

남성중심 性고정관념 탈피
피해자 진술 증명력에 집중
性범죄 재판 첫 가이드라인

“‘2차 피해’가능성 염두두고
진술의 신빙성 판단을”주문

대법원이 13일 2심 법원의 ‘성인지 감수성’(남성 중심 문화에서 벗어난 성 관념)이 결여된 ‘시각’을 질타하며, 법원이 성희롱 피해자 편에 서서 ‘진술의 증명력’을 파악해야 한다는 성희롱 소송 심리의 ‘대원칙’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미투(Me Too)’ 운동을 계기로 성희롱 가해자에게는 관대하며 ‘2차 피해’로 두려움을 겪는 피해자의 진술을 ‘빡빡하게’ 판단하는 일부 법관에 대한 비판이자, 사법부 내부 자성의 목소리를 낸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향후 법원에서 성희롱 피해자의 인권보장·권리구제와 관련한 전향적인 판결이 잇따라 나올 전망이다.

◇대법, 이례적으로 하급심 시각 조목조목 비판 =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여학생을 성희롱한 사유로 해임된 A 대학교수를 복직시키라고 한 2심 판결을 조목조목 따졌다. 그가 수업 중 질문을 한 학생을 뒤에서 안는 듯한 ‘백허그’ 포즈로 지도한 혐의에 대해 2심은 △많은 학생이 있는 실습실에서 백허그를 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점 △익명 강의평가에서 피해자가 A 교수의 교육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점 등을 근거로 “발생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했다”며 “법원이 충분히 심리한 끝에 상반되는 증거를 비교·대조해 증명력을 평가해 내린 결론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2심 법원이 납득할 만한 근거도, 제대로 된 심리도 없이 피해자의 진술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또 A 교수가 학생에게 “뽀뽀해 주면 추천서를 써주겠다” “남자친구와 왜 사귀냐, 나랑 사귀자” “엄마를 소개시켜 달라”고 말한 것에 대해 2심은 △평소 A 교수가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며 자주 농담을 한 점 △대화 가운데 극히 일부분인 점 등을 근거로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같은 점을 근거로 성적 굴욕감을 느낄 수 없다고 본 점을 수긍할 수 없다”며 “법원이 성희롱 피해자들이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은연중에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을 토대로 평가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이라고 비판했다.

대법원은 또 “가해자가 교수이고 피해자가 학생이라는 점, 학생 취업에 중요한 추천서 작성을 빌미로 성적 언동이 이뤄진 점, 성희롱 행위가 일회적이지 않고 계속된 점 등을 고려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진술의 증명력’ 판단 기준 제시 = 대법원은 ‘2차 피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술 판단에 있어 ‘2차 피해’ 가능성을 살피라는 명시적 주문이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피해 이후에도 가해자와 종전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 △피해 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한 이후 신고하는 경우 △피해 사실을 신고한 이후에도 수사기관·법원에서 진술에 소극적인 경우 등이 있다며 “성희롱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 진술의 증명력을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2심 법원의 ‘시각’을 문제 삼는 발언이자, 전국 법관들에게 성희롱 범죄 판단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손기은 기자 s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