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언어장벽 무너진 인간, ‘바벨탑’ 다시 세울까

  • 문화일보
  • 입력 2018-05-1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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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인공지능으로 언어장벽이 사라질 미래, 외국어는 특수계층의 기득권 재생산 통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평화의 시대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희망했다. 사진은 피터르 브뤼헐의 ‘바벨탑’. 자료사진


외국어 전파담 로버트 파우저 지음/혜화1117

근대 이후 외국어 개념 등장
국가간 교류·이동 많아지며
문자 습득서 말로 영역 확대

제국주의·선교 등과 맞물려
강대국서 약소국으로 ‘전파’
도시화·문명화·세계화 따라
소수어 몰락·영어 집중 강화

AI기술, 언어장벽 제거 가능
언어 습득, 평화의 도구 돼야

미국인 언어학자 한글로 저술


세계사, 정치사, 사회·경제사는 말할 것 없고 문화사에서도 한 챕터 혹은 작은 변수로 등장하는 ‘언어’, 그중에서도 ‘외국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언어문명사다. 같은 대상도 다른 틀로 보면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고 새로운 자극을 만나듯 이 책도 그렇다. 책은 제목대로 인류 역사 속 외국어 전파의 문화사, 그 이야기이다. 언어가 국경과 언어권을 넘으면 자연히 외국어가 되기 마련이니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문명과 문명이 교류하고, 부딪치고 충돌해온 인류의 역사는 곧 ‘외국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책이 어느 정도 그렇지만 이 책의 정체성은 저자의 정체성과 곧바로 연결돼 있다. 저자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밖에서 더 많이 생활한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다. 서울 종로구 서촌에 ‘어락당’이라는 한옥을 짓고 ‘서촌홀릭’이라는 책을 낸 그이지만 저자의 미국 밖 삶은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일본에 두 달 머문 것을 계기로 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멕시코, 스페인, 일본, 한국 등에 머물며 그 나라 언어를 익혔다. 대학 졸업 후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미국 대학원에서 응용언어학을 공부했다. 대학원 졸업 후엔 한국으로 와 고려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독일문화원에서 독일어를 배웠고, ‘맹자’를 읽으며 한문을, 시조(時調)를 읽으며 중세 한국어를 익혔다. 그 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과정을 거치며, 프랑스어도 배웠다. 이후 교토(京都), 구마모토(熊本), 가고시마(鹿兒島)대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쳤고, 2008년 서울대 국어교육과 부교수로 임용돼 한국에 6년간 머물다 지금은 미국에서 ‘독립학자’로 지내고 있다.

저자의 이력을 꽤 길게 옮긴 것은 모국어인 영어가 아니라 한국·중국·일본어를 포함해 제2, 제3 외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며 그 언어를 매개로 그곳의 사람, 문화, 역사를 탐구해온 저자의 삶 자체가 외국어 전파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파담의 주인공답게 자신에게 ‘외국어’인 한글로 쓴 책은 영어라는 최고 권력어에 집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어로서의 영어 문명사를 제국주의와 권력으로 풀어내며, 한국과 일본, 중국은 물론 인도와 베트남, 몽골, 이슬람 왕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선주민 등 다양한 언어를 둘러싼 여러 풍경을 포괄적으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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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기원전 1000년경 인류사에 기록된 첫 외국어 교재에서 시작한다. 기원전 1000년경에 제작된 점토 서판으로 후대 아카드인이 수메르인의 쐐기문자를 배우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점토 서판에는 해당 쐐기문자에 대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 발음이 표기돼 있다. 쐐기문자는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인이 만든 인류 최초의 문자로 수메르인은 기원전 2300년경 아카드인에 의해 몰락했지만, 쐐기문자는 살아남아 그 뒤 1500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이어 책은 중세, 르네상스를 통과하면서 언어가 어떻게 종교의 도구로, 학문과 교양의 패권이 됐는지 살피고 16세기에 이르러 외국어가 부유층의 교양, 문화적 자본이 된 변화도 전한다.

하지만 저자의 관심은 근대 국가 형성 이후의 외국어에 집중된다. 이때 국가가 세계질서의 기본 단위로 등장하면서 외국어라는 개념이 비로소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선교 등과 언어의 관계에 집중하며 언어가 국경 밖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을 철저히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것으로 봤다. 그 흐름은 당연히 힘 있는 국가에서 힘없는 국가로 향한다고 했다.

그 뒤 도시화, 문명화로 소수 언어의 몰락과 영어의 권력과 집중은 더 심해졌다. 그렇게 도달한 21세기. 저자는 21세기 후반에 이르면 모어와 외국어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로벌화가 가속화돼 국가 간 경계는 불분명해지면서 국어냐, 외국어냐는 구분보다 모어와 제2 언어, 제3 언어라는 개념의 사용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인류는 언어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됐다. 다름 아닌 인공지능(AI)이다. AI가 기술적으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AI 시대에도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영어의 위상도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갈수록 더 강력해질 기술과 테크놀로지, 그 기기의 운영체제 기반이 이미 영어로 구축돼 있기 때문에 영어의 위력은 더 단단해진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바벨탑’(1563)이 던지는 화두로 책을 마무리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인간들은 신의 진노를 산 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다시 같은 언어를 사용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인공지능이 그 꿈을 실현해 줄 것인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게 해 줄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능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제 도구 너머의 다른 무엇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가 그 고민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희망하는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이해, 평화, 화해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특수한 계층이 외국어를 통해 누려온 기득권의 재생산 대신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만드는 데 적극 참여하는, 또 다른 의미의 사회적 자본의 획득으로 기능하는 것. 그가 바라는 인류 ‘외국어 전파담’의 귀착지이다.

한편 책에는 언어의 전파에 관련된 많은 도판이 수록돼 있다. 관련된 도판들을 한 페이지에 배치, 도판들만 보더라도 외국어 전파 역사의 결정적 주요 대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편집이 돋보이는 책이다. 356쪽, 2만 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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