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28일 경기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자리한 사회복지법인 ‘안나의 집’ 1층 노숙인 급식소에서 김하종 신부가 호박전을 부치고 있다. 김 신부는 지난 1998년 처음 노숙인 무료급식을 시작한 이래 매일 직접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伊서 날아온 천사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
자생적 가톨릭 성장 韓에 매력
28년전 “이곳이 내 나라” 다짐
순교자 김대건 신부 姓을 빌려
‘하느님의 종’ 뜻으로 이름지어
성남 홀몸노인 무료 급식하다
IMF때 실직자 몰려 공간부족
한 신자가 무료로 건물 빌려줘
그분 어머니 세례명이 ‘안나’
한끼 식사 준비에 쌀만 120㎏
쌀 바닥나고 돈 다떨어졌을 때
갑자기 나타난 쌀 트럭에 울컥
도움 주신 분들이 곧 ‘예수님’
직접 겪은 ‘난독증’ 치료 홍보
가출 청소년 등 보듬은 공로로
올 포니정 재단 ‘혁신상’수상
상금은 안나의 집 신축에 사용
“이제부턴 이 나라가 내 나라요, 이 민족이 내 민족이다.”
지난 1990년 5월 11일, 30대의 한 서양인 사제가 고향 이탈리아를 떠나 김포공항에서 한국 땅을 밟았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면서 그는 다짐했다. 그리고 28년이 흐른 지금, 그는 노숙인·가출청소년 등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경기 성남시의 사회복지법인 ‘안나의 집’ 대표 김하종(61) 신부의 이야기다. 본명은 빈첸초 보르도(Vincenzo Bordo)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하느님의 종’이란 의미를 담아 지금의 한국 이름을 지었다. 성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사제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에게서 물려받았다.
지난 28일 경기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안나의 집 회의실에서 김 신부를 만났다. 회의실 벽에는 성(聖)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1782~1861)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성 에우제니오는 프랑스의 귀족 신분임에도 평민의 삶을 지향하며 병자와 수감자 등 가난한 이웃을 위한 사역에 투신한 성직자다. 김 신부는 성 에우제니오가 삶을 통해 보여준 신앙적 교훈을 이역만리 타향에서 실천하고 있다.
김 신부는 안나의 집을 중심으로 노숙인과 가출청소년 자활을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사업이 노숙인 무료급식이다. 인터뷰가 있던 이날도 오후 1시가 되자 김 신부는 앞치마와 위생모를 착용하고 주방 직원 및 자원봉사자들과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이날의 주요 메뉴였던 제육볶음과 된장국 재료인 돼지고기와 곤드레나물을 칼로 능숙하게 손질했다. 이날은 총 550인분의 음식이 준비됐다.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일을 해야 하기에 김 신부는 로만 칼라를 빳빳이 세운 사제복보다 간편복을 선호한다. 하지만 김 신부의 수수한 옷차림에는 노숙인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도 담겨 있다.
안나의 집에서는 식사 제공뿐 아니라 노숙인의 새로운 출발을 돕고 있다. 요일별로 정형외과(통증클리닉), 내과, 치과, 정신과 등 의료 서비스는 물론 이·미용 봉사, 취업상담도 이뤄진다. 숙소와 자활작업장을 통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도 갖추고 있다.
김 신부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거리의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이곳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아닌 안나의 집을 거쳐 간 수많은 봉사자와 후원자 덕분이라고 한다. 그는 “안나의 집은 후원자와 봉사자 등 도움을 주시는 수만 명의 아름다운 꿈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며 “조금 더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봉사자들의 노력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새로운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의 나눔은 노숙인뿐 아니라 소외된 청소년에게도 전해진다. 지금까지 시내 4곳에 청소년쉼터를 마련했다. 이곳에서는 가출청소년들이 학교를 다니거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각종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검정고시와 대학수학능력시험 준비를 위한 학습은 물론 집단상담도 이뤄진다. 김 신부의 일과 역시 쉼터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1994년부터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들을 위해 공부방을 운영했는데, 노숙인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가출청소년이 많은 것을 알게 돼 청소년쉼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신부가 이처럼 봉사를 인생의 과업으로 삼게 된 이유는 어린 시절과 무관치 않다. 유달리 조용했던 그는 유년기에 난독증을 겪었다. 또래보다 갑절 이상 노력한 결과, 난독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읽기와 쓰기 등 기본적인 해독능력이 떨어져 친구들이 1시간이면 끝내는 공부도 나는 2~3시간이 걸렸다”며 “내가 어려우니까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처럼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국내에 대중적으로 난독증을 처음 알린 사람이다. 외국에서 간행된 난독증 치료에 관한 서적을 번역해 국내 초·중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국가마다 5% 정도의 인구가 난독증을 겪고 있다는 게 정설로 알려져 있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한국에서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어요. 난독증은 지능에는 문제가 없고 읽고 쓰는 데에만 어려움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때 도움만 받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학업에 큰 차질이 생깁니다. 난독증을 겪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김 신부는 19세에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으면서 본격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계획했다. 그의 결심을 전해 들은 부모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말문을 여셨죠. ‘네 인생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니 알아서 해라. 다만 신부 생활은 쉽지 않을 테니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그날 아버지가 많이 우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아버지는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짓기를 원하셨거든요. 본인은 원하지 않으셨지만 제게 인생을 선택할 기회를 주신 것이죠. 지금도 아버지가 많이 그립습니다.”
교황립 우르바니아나대에서 철학교육과 신학을 전공하고 그레고리안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30세가 되던 1987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신부가 되면서 마음속으로 예수님과 약속한 게 있다”며 “평생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을 섬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학부 시절 동양철학을 깊이 탐구했던 그는 한국의 천주교 역사와 문화에 감명을 받고 한국에서의 사역을 계획했다. 그는 “선교사들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이 생긴 나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사례”라며 “그 순교의 역사가 나를 한국으로 이끈 것 같다. 선교사들이 오기도 전에 학자들이 중국에 가서 천주학 서적을 구해 가톨릭을 전파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국내에 들어온 김 신부는 한국 오블라띠 수도원에 입적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를 강조하는 수도원의 전통을 존중한 것이다. 그리고 서강대 어학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성남을 사역지로 선택하게 된다. 여기에는 성남 신흥동 성당의 배영섭(베드로) 신부가 큰 영향을 미쳤다. 김 신부는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을 물색하던 중에 배 신부님으로부터 성남지역 사역을 권유받았다”며 “1991년 당시 성남은 분당 신도시가 개발되기 한참 전이라 정말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다. 배 신부님을 따라 달동네 신방을 다녔는데 정말 못사는 사람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1992년 어학 공부를 마치고 신흥동 성당의 보조신부를 자처한 그는 지역에서 빈민 사역을 하던 베네딕토 수녀회의 메리 엔젤 수녀와 함께 홀몸노인을 대상으로 무료급식 사업을 벌였다. 저녁에는 가정을 방문하고, 소년소녀 가장이나 집안 형편상 공부를 할 수 없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운영했다.
그러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몰아닥쳐 실의에 빠진 이들이 대거 거리로 내몰렸다. 성당에 딸린 공간에서 급식소를 운영했는데 실직자와 노숙인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공간이 부족해졌다. 때마침 한 신자가 김 신부를 찾아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뭔가 하고 싶다’며 건물을 무료로 빌려줬다. 이로써 안나의 집이 마련됐다. 김 신부는 “그 신자의 어머니 세례명이 ‘안나’였다. 그때부터 안나의 집이 됐다”고 소개했다.
처음 노숙인 무료급식 사업을 시작했을 때에는 주위의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욕도 많이 먹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노숙인이 더 생긴다’ ‘알코올의존자한테 밥을 주지 말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막대한 식자재 비용과 일손이 문제였다. 식사를 하러 오는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 번 식사를 준비하는 데 드는 쌀만 120㎏이었다. 이탈리아의 지인에게 후원을 호소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한 번은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쌀이 바닥났다고 한다. 통장 잔액도 다 떨어져 급식을 중단해야 할 판이었다. 할 수 없이 주위에 돈을 빌리러 식당을 나서는 순간, 쌀을 가득 실은 트럭이 당도했다고 한다. 누군가가 쌀을 후원한 것이다. 김 신부는 “급식 사업을 하면서 갑작스러운 난관을 만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형편이 넉넉한 독지가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파출부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귀금속을 팔아 기부를 하던 50대 아주머니, 입사 후 첫 월급을 들고 온 20대 여성, 신혼여행비 500만 원을 쾌척한 예비부부, 군것질을 참으며 저축한 용돈을 꺼내놓은 초등학생까지 도움을 주는 계층과 사연도 다양했다. 김 신부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도움의 손길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신부는 최근 포니정 재단이 제정한 제12회 혁신상을 수상했다. ‘포니정 혁신상’은 현대자동차 설립자인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유지에 따라 혁신적인 사고를 통해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어진다.
김 신부는 “가출청소년 문제는 노숙인을 찾아가 샌드위치를 나눠주는 봉사를 하던 중에 발견했다”며 “봉사자는 현장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기 때문에 혁신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상금으로 주어진 1억 원을 오는 8월 완공될 예정인 안나의 집 신축공사비에 전액 사용하기로 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신축공사는 총 40억 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그는 “재단으로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을 받게 돼 기쁘고, 무엇보다 건물 신축비용을 상금으로 일부 충당할 수 있게 돼 고맙게 생각한다”며 “노숙인과 청소년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성남 = 박성훈 기자 psho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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