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마사 누스바움은 보복하려는 소망이 빠진 분노, 합리적 감정으로 이행해 전략을 탐색하는 ‘도구적 분노’에 주목한다. 사진은 영화 ‘성질 죽이기’의 한 장면. 자료사진
- 분노와 용서:적개심, 아량, 정의 /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복수 바탕에 둔 ‘눈에는 눈’
폭력 반복되는 원시적 해결
가해자 용서도 해독제 아냐
피해 갚겠단 소망 지속 될 뿐
세계 100大 지성 누스바움
철학 등 총동원 ‘憤怒’ 분석
南·北·美 종전협정 거론 시기
저자 “딱 적절한 때 韓서 출간”
분노의 시대다. 사람들은 정치의 적폐에 공분하고, 가진 자들의 ‘갑질’에 분노하며, 공사를 불문하고 벌어지는 파렴치한 범죄에 치를 떤다. 정작 분노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인문학적 분석이 없다. 분노가 곧 정의처럼 여겨지고, 분노를 정확히 따져보자고 한다면 마치 “가만히 있으라”처럼 비겁하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비판받을지 모른다. 분노에 대해 분석해보자는 말 자체가 용기를 필요로 할 만큼 분노는 이 시대의 공통 정서가 됐다. 기껏 분노를 삭이거나 다스릴 대상으로 보고 ‘힐링’을 말하는 정도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이 책에 따르면 세계적인 현상이다.
놈 촘스키, 움베르토 에코 등과 함께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선정하는 ‘세계 100대 지성’에 꼽혔던 마사 C 누스바움 미국 시카고대 철학부 교수는 이 책에서 법철학자이자 고전학자, 여성학자 등 다양한 자신의 전공을 충분히 살려 ‘분노’의 문제를 다룬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불행히도, 제 책은 주제가 지나칠 만큼 시의적절한 순간에 대한민국에서 출간됩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미·북 간의 대화를 앞둔 가운데 한반도가 보복적 분노를 지양해 미래의 평화로 마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바로 분노의 커다란 속성인 복수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우리는 오직 미래만을 바꿀 수 있다는 전제하에 분노와 그 미래지향적 해결 방안을 고전과 철학, 법철학, 여성학의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다.
역사적으로 분노는 남성적인 것, 분노하지 않는 것은 약하고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분노의 본질은 복수와 연관돼 있다. 분노라는 개념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 중요한 존재가 심각한 부당행위를 당했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그 부당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나쁜 결과를 겪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그 중요한 하나는 ‘인과응보’라는 방식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분노와 보복의 성향은 인간의 심리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과응보를 통해 이미 손상된 것을 복구하거나 미래의 잘못을 억제해 정의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은 동서양 어디서나 나타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저자는 간디의 말을 빌려 “눈에는 눈을 고집하면 온 세상의 눈이 멀게 된다”며, 역사적으로 봐도 보복은 폭력을 부를 뿐 세상을 바로잡지 못했던 원시적 방식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자신 혹은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가 정당한 이유 없이 ‘무시’당했다고 상상하고 이에 대한 복수를 상상할 때 발생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욕망”이라고 정의했다. 분노를 고통과 쾌감 모두와 연관돼 있는 복잡한 감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지위에 초점을 두는 분노다. ‘지위의 격하’ 혹은 자아가 입은 피해에 반응해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가해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약화시키거나 그 지위를 떨어뜨리고자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저자가 ‘지위-피해’로 부르는 이런 방식은 지배력 및 통제력 부족을 느끼는 취약한 자아의 열망 즉 유아기적 자기애와 맞닿아 있다. 그저 하나의 불평등이 다른 불평등으로 대체될 뿐이며 보복의 공전을 부를 뿐이다.
이 두 가지 분노의 방식에 대해 저자는 마틴 루서 킹 목사나 넬슨 만델라 등이 보여주었던 ‘이행-분노(Transition Anger)’라는 방식을 구분 짓는다. ‘말도 안 돼!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라는 데서 그치는 방식, 보복에의 소망이 빠진 분노다. 이는 분노를 합리적 감정으로 이행하며, 분노의 도구적 역할과 분노를 통한 전략을 탐색하는 것이다. 킹 목사는 백인들의 차별주의적 억압에 분노하면서도 인과응보의 소망을 미래에 대한 다른 그림으로 돌린다. 저자는 ‘비폭력’에 빗대 이를 ‘비-분노’로 정의한다.
저자는 흔히 분노의 해결책처럼 제시돼온 ‘용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부정적 입장이다. 현대적 용서는 가해자가 비굴함과 자기비하의 과정을 거치고, 피해자는 승리감에 젖어 분노라는 감정의 부담을 내려놓는 ‘교환적 용서’라고 저자는 본다.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유래하는 이런 거래적 형태의 용서는 분노의 해독제이기는커녕 오히려 분노에 깃들어 있는 피해를 갚아주겠다는 소망을 이름만 바꾸어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저자는 상대에게 사전에 회개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사과가 미래의 관계에 대한 증거로서 유익한 것이 돼야 하는 ‘만델라’의 용서를 높이 산다.
저자는 분노를 가족 등의 ‘친밀한 사적 관계’와 일상과 직장에서의 ‘중간 영역’ ‘정치적 영역’ 등 세 영역에서 다룬다. 영역마다 분노의 대응방식도 다르다. 특히 정치적 영역에서 사법제도에 분노라는 감정이 개입돼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범죄를 예방하거나, 범죄피해를 사후적으로 복구하는 데에 분노라는 감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분노 감정이 개입할 경우 사법제도가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 사이에서 불균형하게 작동하게 된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는 “공평한 정의를 이루기 위해 분노를 내려놓는 건 소심한 반응이 아니다”라며 분노의 해결은 “순전히 미래지향적인 문제, 사회적 제도가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루는 문제가 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584쪽. 2만8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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